식치방(食治方)
한의학은 자연 현상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물리학과 연구의 대상이 동일하므로 '한방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진즉 생겼을 법한데, 오히려 동질성이 덜한 다른 학문들이 먼저 물리학과의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점이 몹시 유감스럽다. 간단한 예로 만일 본초(本草)의 '한열(寒熱)'을 '그 본초가 인체에 들어가 체내에서 생성되는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에 미치는 영향력' 정도로 해석하고 실험 방법을 개발하여 입증한다면 이건 한방물리학적인 발상일 수가 있다.
실제로 한의학의 가장 중요한 치료 원칙은 현상을 치료하지 않고, 그 현상이 발생하게 된 전신적인 불균형을 치료하는 것에 있으므로, 물리학적인 역학관계와 비교하여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여러 분자가 모여 세포를 만들었지만 그 집단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놀랍게도 생명현상이 떠오른다"라는 사실은 전체를 이해하려면 낱개로 쪼개서 각 부분을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한 환원주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낱개를 하나씩 아무리 연구해도 여러 낱개가 모여 형성된 전체의 집단성질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이런 이론에 굳이 비유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밥상에서 먹는 식품이라는 생명체를 부분적인 일부 성분으로 대변하려는 경향은 정말 옳지 않다는 것을 한방 임상을 하다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발상과 행위는 과학을 빙자하여 자연과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사람이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와중에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역동적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협의의 목적이 아닌, 원활한 일상 생활 같은 광의의 목적을 위하여 섭취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알려진 일반적인 지식으로 해석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광의의 목적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병적 상태를 해결할 목적으로 그에 적합한 음식을 섭취하려 한다면 그에 뒷받침하는 이론도 일반적일 수가 없고, 식이요법 같은 부분적인 논리로는 더욱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식품을 통째로 해석하는 전체적인 논리-기미론, 본초학, 방제학-를 기본으로 하여 유구한 세월 동안 충분한 인체 대상 임상실험을 거치고 고전에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식치방(食治方)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전 속의 식치방이나 한방처방은 수백 년 임상의 결과로 살아남은 Recipe다. 본초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다고 하여 방제학적으로 타당하게 처방을 만들어 사용해도 임상의 결과는 결코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임상을 오래 한 사람은 누구나 알게 되는 상식이다. 즉, 자연의 물질들이 서로 섞여서 어떤 결과를 일으킨다는 임상적인 확신은 이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실험이 없이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식품이라고 하여 면죄부를 주고 마구 섞어버린 것을 의복 하나 더 입은 것 정도로 친다면 이는 정말 자연과학적이지 못한 생각이다.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선율 속에 갑자기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끼어 든다면 환상교향곡도 감상하고 덤으로 꽹과리 소리도 감상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약선방(藥膳方)
약선(藥膳)이라는 용어는 중국 학자들이 불과 수십 년 전에 만든 신조어이다. 동양의학 고전 속의 식치방(食治方)이 비록 식품 위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현대인들이 음식으로 섭취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향미를 가미하여 맛도 있고 효능도 있게 하겠다는 의도로 특수한 음식을 만든 것이 약선의 주류이다. 기존에 그에 합당한 용어가 없어 '약선'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에서는 거의 공용어로 되어 한자 표시는 그대로 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중국에서 근래에 상용하는 "Medicated Diet"라는 영문 표기는 그 본의가 잘못 전달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한국약선연구원(The Institute of Korean Curative Food)에서는 비교적 의미가 통하는 "Curative Food"로 사용하고 있다.
임상 한의사들이 환자를 대상으로 적합한 처방을 하여 한약이라는 명분으로 제공을 할 때는 혹시 식치방을 선택해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질환의 호전만 있으면 명방이 된다. 그러나 요양원 등에서 한의사가 진료하여 환자로 하여금 적합한 약선음식으로 식사를 하도록 하려면 선택한 식치방이 맛있는 요리로 둔갑해야만 한다. 하지만 둔갑을 하고서도 최초의 식치방이 지니고 있는 효과를 그대로 낼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다는 논리적인 설명은 전혀 수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저 그 식치방이 이 안에 있으니까 그렇다고 하거나, 혹은 어떤 성분이 있다는 식의 부분 논리로 전체를 매도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혹은 권위자가 만든 것이니까 타당한 근거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전부였다.
임상 한의사가 고전 속의 한방처방을 끄집어 내어 일정 환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수정하는 일은 수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대가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전해지는 정보이므로 더하고 빼기를 통한 처방의 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식치방에 가미할 식품은 문제가 다르다. 동일하게 본초로 취급되고 약용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상호 결합에 대한 정보의 축적이 한방처방처럼 풍부하지를 못하고 매우 적다. 축적된 정보가 너무 적어서 임상은 물론이고 보편적인 약선 이론을 전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약선방을 만들려면 선택한 식치방의 효능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이 되면서도 맛이 있는 맛내기 식품들을 가미해야 한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어떤 원칙이나 확실한 정보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구한 세월 동안, 특히 중국에서, 수없이 많은 약선방이 만들어져 일반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20년 전부터 몇 개월에 걸쳐 중국 대륙을 여기 저기 횡단하며 중국의 많은 약선을 경험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때부터 몇몇 대학과 연구원에서 중국약선을 모델로 삼아 강의를 했는데 그 문제를 마땅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해, 호남 등의 중의약대학에 재직하는 약선학자들과 10여 년간 교분을 쌓아 오면서 무언가 해결점을 기대했지만 그 역시 허사였다.
관계의 끈
약선의 본체는 식치방이고 이것은 당연히 자연 현상에 관한 직관적인 관찰과 연구를 임상 의학으로 발전시킨 한의학 이론으로 설명이 된다. 2001년에 설립된 '한국약선연구원'의 초창기 회원들은 주로 각각의 대학에서 식품의 성분을 위주로 하는 학문을 수십 년씩 지도해온 매우 분석적인 사고를 지닌 이들이었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영역을 연결하는 한 가닥 끈을 열망하던 중 2001년에 연습 삼아 만들어본 끈이 점점 튼튼하고 굵어지더니 2009년에는 마침내 약선방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놀라운 해결사로 변신하기 시작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은혜를 입은 것이다.
※ 본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KMCRIC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안문생 박사의 약선설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