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의 명을 받들어 어의 허준이 편찬한 의서이다. 이 책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었다. 현대에도 여전히 질병치료에 활용되고 있는 동의보감은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세계의 인정을 받은 동의보감은 양육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을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있을까? 엄마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고 또 엄마의 손길에 따라 아이의 미래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는 말랑말랑한 시기에 꼭 필요한 양육의 지혜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두 명의 아이를 키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나는 이 두 가지가 동의보감이 강조한 양육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 기다려 주어라! 아이의 성장 시계는 엄마의 희망 시계와 다르다.
엄마가 어린 아이를 키울 때 꼭 명심하라고 동의보감에서 강조한 내용들은 하나같이 보통 알려져 있는 상식에 반하는 것들이다. 먼저 아이가 태어나면 대부분 비싸고 좋은 천으로 된 새 옷을 사다 입힌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칠십이나 팔십 세의 노인이 입던 헌 바지나 헌 저고리를 뜯어서 아이의 옷을 입히면 아이가 오래 살 수 있다. 부유한 집이라 하여 새 모시나 새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지 말아야 하니, 아이에게 병이 생길 뿐 아니라 복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갓난아이의 피부는 아직 연약하므로 비싸고 고급스런 새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면 아이의 피부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니 가장 오래되고 낡은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서 아이의 피부에 자극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금의 육아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 뿐이 아니다. 아이가 젖을 많이 먹고 밥을 많이 먹으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기쁘기 그지없다. 혹여나 잘 먹지 않으면 일부러 많이 먹이려고 애쓴다. 그런데 동의보감에서는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젖을 많이 먹으면 결국에는 위(胃)를 손상시킨다. 음식을 많이 먹어 꽉 막히면 소화기를 손상시킨다.” 젖이건 밥이건 많이 먹이지 말라는 것이다.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위와 장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있다. 이유식을 빨리 하는 것 역시 아이를 병들게 한다고 말한다. “음식이 쌓여 병이 되는 식적(食積)이란 것은 대개 아이에게 줄 젖이 없어서 밥을 대신 먹였기에 위장이 소화를 시키지 못하여 생긴다. 아이의 배가 불러 오르면서 허약해지고 온갖 빛깔의 설사를 누게 된다.” 옛날에는 분유라는 것이 없었으니 아이에게 줄 젖이 없을 때에 어쩔 수 없이 밥을 일찍 먹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이의 위장을 병들게 하여 온갖 빛깔의 설사를 누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일부러 이유식을 빨리 하는 엄마들이 있다. 그래야 장이 빨리 성장하는 줄 안다. 동의보감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아이에게 밥을 일찍 먹이면 아이를 허약하게 하고 식적이란 병이 생기게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이를 울리는 것에 대해서도 지금의 생각과 다르다. 지금은 아이가 울면 혹시라도 아이의 정서에 안 좋을까 싶어서 곧바로 울음을 달래주려고 한다. 하지만 동의보감은 반대로 이야기한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기 전에 곧바로 젖을 먹이지 말라.”고 하였다. 아이가 운다고 하여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젖으로 달래지 말라는 것이다. 젖을 먹이더라도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먹이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억지로 젖을 먹이면 젖이 소화되지 않는 유적(乳積)이라는 병에 걸린다고 하였다. 혹시나 배고파서 우는 것이 아닌데도 젖으로 달래려고 하면 병만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갓 나서 계속 우는 아이가 오래 산다.”고 하였다.
이러한 동의보감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기다려주는 양육법’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가 예쁜 마음에 비싼 새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려 하지 말고 아이의 피부가 튼튼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라고 말한다. 젖이나 밥을 많이 먹이려 하지 말고 아이의 소화기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려주라고 말한다. 이유식을 빨리 하려고 서둘러 밥을 먹이지 말고 기다려주라고 말한다. 운다고 바로 먹을 것으로 달래지 말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라고 말한다.
그래서 동의보감에서는 아이를 바로 옆에서 보살펴주는 유모를 고를 때에 꼭 살펴야 할 성품으로 이것을 꼽았다. 바로 ‘성정이 느긋한지 다급한지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느긋하게 기다려줄 줄 알아야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으며, 다급하게 재촉하면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의보감은 책의 곳곳에서 ‘기다려주는 양육법’을 설파하고 있다.
둘째, 인정해 주어라!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다르다.
나는 이런 동의보감의 기다려주는 양육법을 미처 알기 전에 큰 아들을 낳았었다. 그런데 둘째를 나은 후에는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다. 한의학에 관한 지식이 쌓이면서 동의보감의 양육법 역시 내 생활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어떻게 아이를 기르라고 했는지를 알게 되자 아이를 키우는 나의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기다려주는 양육법’을 알게 되면서 저절로 느긋해졌다. 두 명 이상의 아이를 기르는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첫째 때의 경험 덕분에 둘째 때에는 좀 더 느긋해지는 면이 있다. 그런데다 동의보감에서도 기다려주면서 키우라고 말하니 더욱 확신을 가지면서 느긋해질 수 있었다. 배냇저고리도 첫째가 입던 것을 입혔고, 아이를 쫓아다니며 한 숟가락만 더 먹어 달라고 사정하지도 않았다. 이유식도 천천히 시작했고, 아이가 울어도 먹을 것으로 재깍 달래지 않았다.
그런데 둘째를 기르게 되면서 느끼게 된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두 아이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다. 큰 아이는 쫓아다니며 먹여도 잘 안 먹었고, 작은 아이는 차려만 놓으면 알아서 잘 먹었다. 큰 아이는 새벽이 되어야 겨우 잠이 들었고, 작은 아이는 해만 떨어지면 쿨쿨 잠이 들었다. 큰 아이는 야단치면 마구 대들었지만, 작은 아이는 야단치면 놀라 엉엉 울었다. 똑같은 부모에게서 피를 나눈 형제로 태어났음에도 두 녀석은 자라면 자랄수록 각자의 성정이 판이하게 달랐다.
이 사실은 나의 눈길을 동의보감의 첫 페이지에 머물게 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말하는 동의보감이라는 대서사시의 첫 단락은 바로 이 내용으로 시작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존재이다. 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받았기 때문이고, 사람의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본받은 소우주이기에 세상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동의보감의 문을 여는 첫 번째 메시지이다.
바로 뒤를 이어서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사람에 따라 형체와 색깔이 다르고 장부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는 같다고 할지라도 치료법은 다르게 해야 한다.” 즉,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동의보감이 책의 첫머리에서 말하고자한 두 번째 메시지이다.
동의보감은 사람의 생로병사와 치료법을 펼치기 전에 가장 먼저 “사람은 매우 귀하다.”는 것과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것부터 말했다. 사람이란 자연의 이치를 본받은 존재이니 가장 귀하게 여기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치료법을 펼치라는 것을 그 어떤 메시지보다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동의보감은 사람의 형색과 장부가 다르다고 말했지 틀리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다 다르기에 병에 더 걸리고 덜 걸릴 수는 있어도 그것이 선악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체질의 차이는 있어도 체질의 선악은 없다. 체질의 강약은 있어도 체질의 선악은 없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 쉽고 어려운 체질은 있어도, 옳고 그른 체질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체질의 편차가 지나쳐서 병에 걸리게 되면 안 되니 의사가 약으로 고쳐주라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닮은 그 귀한 인격체가 건강하게 살도록 도와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사람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치료법’을 주장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서도 똑같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은 다 다르다. 심지어 같은 부모에게서 난 형제도 너무나 다르다. 이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의 차이는 있어도 성격의 선악은 없다. 성격의 용감함과 겁약함은 있어도 그것이 곧 성격의 선악은 아니다. 엄마가 아이를 기르기 쉽고 어려운 성격은 있어도, 그로 인해 옳고 그른 성격으로 나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이들 한명 한명이 모두 자연의 이치를 닮은 귀한 인격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성격의 편차가 지나쳐 병에 걸리면 안 되니 엄마가 사랑으로 키워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아이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양육법’을 전제했다는 것을 두 아이들을 키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동의보감의 내용을 조금씩 더 이해할수록 두 아이를 더 잘 키울 수 있게 되었고, 반대로 두 아이를 키울수록 동의보감의 내용이 더욱 잘 이해가 되었다. 만약 아이 둘을 낳아서 키우지 않았다면 동의보감의 ‘기다려주는 양육법’과 ‘인정해주는 양육법’을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를 낳은 후에야 비로소 배우고 깨닫게 되었지만, 만약 첫째를 낳았을 때에도 누군가 나에게 알려주었더라면 초보 엄마였던 나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지 않았을까?
© 한의사 방성혜의 엄마가 읽는 동의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