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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 내 마음에 스며든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 통영이지만, 충무공의 흔적을 빼놓고 그 해안 도시를 설명할 수는 없다. 통영은 이순신의 도시니까 말이다.



조선 최고의 명품을 만들던 도시


최근 몇 년 사이 세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여행지 중 하나는 분명 통영이다. ‘동양의 나폴리’ 같은 수식어가 붙을 만큼 통영의 아름다움이 재조명됐고, 각광받는 여행지가 됐다. 사시사철 올라오는 신선한 해산물로 만드는 온갖 먹거리도 통영을 부각시키는 요인이었다. 그렇지만 통영이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정작 부각돼야 할 면모는 희석되어 갔다. 통영은 충무공 이순신으로 인해 시작했고 이순신이 있었기에 급속히 발달했으며, 지금도 이순신의 흔적을 곳곳에 간직한 도시다. 1592년 7월 8일은 통영 앞바다에서 그 유명한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날이다. 잊고 있던 통영의 진면목을 재발견하기에, 7~8월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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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이라는 지명은 그 자체로 충무공과 관련이 깊다. 통영이라는 두 글자는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따온 말. 삼도수군통제영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는 해군사령부와도 같은 기관을 일컫는다. 충무공은 왜군이 쳐들어오자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그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지휘부를 통째로 일본과 가까운 지역에 옮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다. 이곳에서 충무공은 수군의 전력을 집중시켰고, 세계 해전사에 다시 없을 전투인 한산도대첩을 완성한다. 통영의 옛 지명으로 알려진 충무 역시 충무공에서 따온 말이었다.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충무시와 통영군을 통합하면서 이 일대가 통영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어떤 여행이든 가고자 하는 곳의 지명에 얽힌 사연부터 살피는 게 좋다. 그 안에 깃든 일화를 알게 되면 여행지를 대하는 태도부터 바뀌기 마련이다.


궤멸에 가까운 패배는 일본에 두려움을 안겼고, 조선인에게는 희망을 품게 했다. 백성들은 충무공 이순신의 그늘 아래 있다면 안전하리라 생각했고, 통영 땅으로 모여들었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통영 땅은 순식간에 번성 일로를 걸었다. 인구가 늘고, 장이 서고, 공방이 만들어졌다. 왜란 이후 이 일대에 인구가 늘어나자 전국의 공인이 통영으로 모여들었고, 부채, 갓, 문방구, 나전칠기 등 총 열두 가지 공예품이 최고의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12 공방의 시작이다. 지금이야 그 명성이 퇴색한 지 오래지만, 맥은 아직도 이어진다. 통영 군청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조성한 통영시립박물관은 12 공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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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내려다보는 세병관의 위용


“요즘 젊은 친구들은 동피랑, 서피랑을 많이 찾는다 카지만, 통영을 왔으모 세병관을 꼭 봐야지예.”
통영 현지에 있는 지인은 세병관을 꼭 보라고 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중심이 되었던 건축물. 충무공이 한산도에 세운 통제영은 원균이 통제사를 맡던 시절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면서 불에 타 무너졌다. 이후 한동안 통제영을 다시 세우지 못하다가 조선 선조 37년(1605년)이 돼서야 제6대 이경준 통제사에 의해 지금의 세병관이 있는 자리에 세워졌다. 통제영이 자리를 잡자 그 역할은 공고해졌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무너지기 전까지 약 290년간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수군의 사령부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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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과거 통제영의 모습을 다 볼 수 없지만, 세병관이 홀로 남아 그 위용을 대변한다. 눈앞의 계단을 올라 지과문(止戈門)을 통과하면 비로소 그 웅장함을 드러낸다. 세병관은 목조단층 건물로는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한다. 앞면 9칸, 옆면 5칸 규모로 눈앞에 길쭉하게 늘어섰는데, 여느 궁궐의 전각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위풍당당하다. 과연 조선의 수군을 총괄하는 자리라 할 만하다. 더불어 국보 제305호로 지정된 이유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예전에는 세병관 아랫동네인 문화동 일대까지 바다가 들어왔고, 군함 수백 척이 늘어서서 통제사의 명에 따라 앞바다를 향해 기동했다고 전한다. 세병관이라는 이름도 지금은 간척의 과정을 거쳐 바다가 저 먼 곳으로 물러나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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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판이다.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가로 6.52미터, 세로 2.43미터. 국내에서 가장 큰 편액으로 기록돼 있다. 국보 1호인 숭례문(1.5×3.5)보다 크고,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에 있는 전주 객사 현판(4.7×1.8)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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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은 누구나 안에 들어와 쉬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놓고 있다. 마침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이 뜨겁다. 전각은 사방이 열려 기둥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 세병관 마루에 올라앉았다. 기둥과 기둥이 한 폭의 캔버스가 되어 뒤편의 풍광을 그림처럼 담는다. 자연이 건축에 스며 눈을 즐겁게 해주니 자연이 선사하는 명작이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낀다. 세병관을 휘도는 바람에 대숲이 솨아 우는 소리가 청량하다.



한산도 달 밝은 밤, 충무공의 그 자리


통영 이곳저곳에서 충무공의 흔적을 찾았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통영의 중심 강구안에는 임진왜란에서 사용하던 거북선을 실물로 복원해 띄워놓았다. 거북선만 세 척, 판옥선 한 척이다. 그중 한 대는 한강에 띄우던 것으로 2005년경 통영에 기증한 것이다. 나머지 두 척은 전라좌수영 거북선, 통제영 거북선이다. 전쟁 초기에 만든 거북선의 형태와 통영에 지휘부를 둔 이후 사용한 거북선의 형태나 구조가 다르다. 이를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여름이 되면 이순신 공원으로 통영 전체의 이목이 집중된다. 이순신 공원의 앞바다는 한산도대첩이 벌어진 현장이다. 한산대첩축제의 일환으로 이순신 공원 앞바다에서 한산도대첩을 재현하는데, 그 유명한 학익진이 실제로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산대첩축제는 통영에서도 가장 유명한 축제로 올해 58회째를 맞이한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매년 통영 일대의 모든 역량이 이 축제에 집결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전국을 통틀어 60년 가까이 이어지는 축제는 많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한 번쯤 가 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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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순신 장군이 처음 통제영을 설치했던 한산도 제승당을 찾았다. 임란 중에 폐허가 됐던 통제영은 박정희 정권 당시 대대적으로 복원 작업을 거쳤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로 이름 높은 충무공의 <한산도가>의 무대가 되는 곳으로, 통영에서는 성지처럼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과 활 연습을 하던 곳부터 제승당까지 옛 운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충무공이 긴 밤 홀로 앉아 시름 하던 수루에 올랐다. 저 멀리 통영이 내려다보이고, 한산도대첩이 펼쳐졌던 앞바다가 선명하다. 이곳에서 충무공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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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시장 모퉁이의 시락국집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여기서 뭘 먹는 게 좋겠수?”
“시락국 무라. 서호시장 안쪽으로 쭉 들어가모 가마솥시락국이라고 있그든. 가가 내 얘기하고 회 만 원어치만 썰어달라 카모 잘 해 줄기다.”


일전에 그 상호를 본 것도 같았다. 서호시장 안쪽을 따라 들어간다. 시장 바깥에도 시락국 가게는 많지만, 그냥 저 집을 추천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시장 구석 저 안쪽으로 상호가 보인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가 그리 수월치는 않을 법한, 그런 작고 허름한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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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길쭉하게 테이블이 하나 놓였다. 많이 잡아야 여덟 혹은 열 명이 부대껴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식당. 메뉴는 시락국 하나다. 혼자서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회까지. 국밥 하나에 막걸리를 시켰다. 적당한 크기의 접시를 하나 내어주며 원하는 반찬은 알아서 덜어 먹으란다. 모르는 이와 어깨를 맞대고 내가 원하는 반찬 몇 가지 덜어 먹는 이런 집, 정말 좋다. 사람 사는 곳에 들어와 있는 기분. 반찬도 여덟 가지 남짓으로 제법 많다. 막걸리를 따라 반찬으로 안주 삼아 한 잔 들이켰다. 달큰하고 시원한 그 맛이 입안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국밥을 내준다. 식당 안쪽 모퉁이에 칸막이를 쳐 놓고 토렴을 해서 내어 주는 게 귀한 밥상을 만났구나 싶어 내심 흐뭇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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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부터 국밥을 토렴해서 내어 주는 게 관례였다. 늘 따신 밥을 새로 해서 내어줄 수 없다면 적당히 식은 밥을 데워서 손님에게 줘야 할 텐데, 이때 뜨거운 국물을 몇 차례 끼얹어 온도를 올리는 토렴은 좋은 해법이었다. 그 과정에서 찬 밥알 하나하나가 풀어지며 전분기가 빠진다. 이 말인즉슨 국물이 가진 고유의 맛이 전분 때문에 쉽사리 탁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미 끈적한 전분이 빠진 밥알이 혀끝에서 거슬리지 않고 잘 씹힌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리 해둔 밥을 퍼서 온장고에 넣어두면 될 것을 뭐하러 귀찮게 토렴까지 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그 귀찮은 과정이 있어 하찮은 국밥 하나가 정성 가득한 밥상으로 완성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불어 온장고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밥알을 구태여 인상 찌푸려가며 씹을 일도 없다. 시장 구석의 허름한 국밥집에서 귀한 손길 가득한 밥상을 만난다.


시락국이라 함은 시래깃국이다. 어떤 집은 장어뼈를 우려서 육수를 내기도 한다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시락국은 충분히 훌륭하다. 구수한 국물과 하늘하늘 익어서 풀어진 시래기, 그 사이의 간극을 훌륭하게 메워주는 밥알의 단맛까지. 4,500원짜리 한 그릇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감동적인 맛이 펼쳐진다. 이것이야말로 통영의 맛이 아닐까 싶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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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을 아껴가며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웠다. 아직도 햇살은 쨍하게 쏟아지는데, 살포시 취기가 올라온다. 식당 안의 손님들은 새 손님이 오면 알아서 자리를 당기고 가방을 치워가며 함께 자기 몫의 국그릇을 비워내고 있었다. 흡족하게 식당 안을 둘러보다 국밥값을 지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무공도 저 맛을 알았을까? 배움이 짧아 그것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충무공이 활약하던 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쏟아지는 햇살 뒤로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통영의 여름이 푸르고 짙은 빛깔로 머리 위에서 파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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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는 무 또는 배추의 잎을 말린 것을 말한다. 어원은 채소의 쓰레기라고 하지만 영양도 좋고 맛도 좋아서 요즘은 시래기 전용 무를 따로 심을 정도다. 잘 말린 시래기는 칼슘이 풍부해 뼈를 튼튼하게 해주어 골밀도 향상에 도움을 준다. 다량으로 함유한 비타민 K는 칼슘이 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억제해 골다공증 예방에 좋다. 섬유질도 많아서 나쁜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내려주고 혈관을 건강하게 만든다. 동맥경화나 고혈압 같은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이다. 말린 채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기에 식이섬유가 많은 것도 시래기의 장점이다. 당연히 배변을 원활하게 만들어 주기에 변비에 좋은 식품이다. 또 무청 시래기의 경우 무에 비해 철분이 4배 이상 많아 빈혈에 효과가 있고 베타카로틴 (β-carotene)과 글루코시놀레이트 (glucosinolate) 같은 성분이 암세포의 증식과 전이를 억제하는 작용을 한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