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년간 우리 땅 곳곳을 쏘다녔지만 유독 인연이 닿지 않았던 곳이 있었다. 한반도 동쪽 끝 독도. 세 번의 아쉬움 끝에 그 땅에 드디어 발을 디뎠다.
긴 기다림, 떠나지 않는 불안감
마지막으로 뱃머리를 돌리던 날만 해도 다시는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처음에는 아예 배가 뜨지도 못했고, 두 번째는 가는 길에 기상이 악화돼서 도중에 돌아왔다. 그만큼 동해의 일기는 예측이 어려웠다. 세 번째 도전에 나설 때는 무난하게 독도에 오를 줄 알았다.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가서야 파도가 높아서 접안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또다시 좌절했다. 대신 독도평화호의 선원들은 배 난간에 나가 독도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끔 해주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과 쏟아지는 오후 햇살이 부서지는 독도의 풍광은 웅장했다. 동도와 서도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동안 배에 탄 모두가 다른 어떤 말 없이 “우와!”하는 감탄만 연발할 만큼 신비한 무엇이 서려 있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독도에 함께 들어가자는 제안을 다시 받은 건 마지막 실패로부터 5년이 지난 후였다. 대전의 여행문화학교 산책과 세종독도연구소가 함께 진행하는 ‘독도탐험대’의 일원으로 가자는 제안이었는데, 이번에는 괜찮을지 자못 걱정이 앞섰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건, 그간 실패로 말미암아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성공적인 상륙을 낙관하는 사람들과 달리 동해의 변덕을 누구보다 많이 겪었던 탓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다시 길을 나섰다. 누가 들으면 히말라야 14좌 완등 실패담인 줄 알겠지만, 독도 상륙기는 그것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출발 일주일 전, 탐험대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들었다. 예정일 기상이 아주 좋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고. 그러나 출발 3일 전부터 기상예보는 다시 틀어지고 있었다. 하필 상륙 당일부터 비, 비, 비. 섬으로 들어가는 길에 비는 큰 문제가 아니다. 비구름이 몰고 오는 바람이 관건이다. 바람이 불면 풍랑이 일고 뱃길이 막힌다. 파도가 2~3미터만 높아져도 격하게 움직이는 동해의 특성상 독도 선착장에 접안이 어려워진다. 암담했다. 그럼에도 다시 길을 나섰다. 기회는 또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기후라는 건 참 오묘한 존재다. 분명 3일 전까지 빗방울을 흩뿌린다고 나오던 예보가 몇 시간씩 뒤로 밀리더니 울릉도에 들어가자 구름 낀 날씨로 바뀌었다. 희망을 품어 보기로 했다. 출발하는 날 아침, 바다도 마침 잠잠해 보였다. 지나치게 큰 기대는 버리고 짐짓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울릉도를 떠났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두 시간 반. 창밖의 하늘은 파랗게 열려 있었다.
벅찬 가슴으로 디딘 걸음걸음
“우리 배는 30분 뒤 독도의 동도 선착장에 접안합니다. 승선하신 여러분께서는 부디 안전에 유의하시어 독도를 만나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선내 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그 땅을 밟는 것인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쪽 창으로 독도의 서도가 모습을 비췄다. 예의 그 웅장함은 그대로다. 화산섬만이 품어낼 수 있는 기운이다. 주어진 시간은 45분이었다. 당초 3시간가량을 동도에 머물기로 했지만, 안전상의 여러 문제로 이 계획은 승인이 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동도의 정상까지 밟고 와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독도의 정상까지 오르는 탐방로는 제법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화산 지형의 특징상 겨울에 얼었다가 봄에 녹은 이 섬은 탐방로 계단 위로 이따금 후드득 낙석을 떨어뜨렸다. 게다가 이 섬은 괭이갈매기 서식지다. 수십 마리의 괭이갈매기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그 녀석들이 싸놓은 부산물로 발밑이 제법 미끄러웠다. 여유 있게 섬의 운치를 즐기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청록빛 맑은 바다는 마치 계곡물 같았다. 기암괴석은 어디서도 느끼지 못할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 독도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다. 괭이갈매기의 번식기가 얼마 남지 않아 외부의 자극에 아주 민감한 상태라고 했다. 갈매기 떼가 자극을 받으면 알을 훔치러 온 것으로 오인해 온갖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의를 단단히 받았다. 무엇보다 괭이갈매기 떼의 오물 폭탄 세례는 가장 경계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녀석들의 둥지는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고 심지어 탐방로 바로 곁에도 숱하게 둥지를 틀어 놓은 상황이었다. 자꾸만 째려보는 괭이갈매기의 눈빛이 매섭다. 눈치를 보면서 계단을 따라 동도의 정상을 향해 올랐다.
독도를 이루고 있는 두 섬 중 서도는 무척 가파른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동도는 탐방로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공간적인 여유를 가진 섬이었다. 독도경비대의 막사도 동도에 있다. 탐방로는 독도경비대원이 일본 쪽을 경계하며 근무하는 길이자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허가만 받을 수 있다면 탐방로를 따라 볼 곳이 꽤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날 우리에게 허가된 방향은 오직 동도의 정상뿐이었다.
선착장에서 약 15분 정도. 탐방로를 따라 오르는 길에 울릉군이 설치한 빨간 우체통도 만나고 ‘한국령’이라 새겨둔 표지석도 만난다. 그리고 독도경비대 막사 위로 올라섰다. 이곳이 동도의 정상이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365도로 돌아보면서, 마지막으로 맞은편 서도를 본다. 이 두 섬은 한반도의 동쪽 끝에 자리한 우리의 영토이자 국권 수호를 위한 자존심이다. 그 누가 이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기록으로 보나 실질적인 점유권으로 보나 이 땅은 우리 땅이다. 까불지 마라. ‘한국령’ 표지석은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현대판 의병, 독도의용수비대
독도가 온전히 우리의 땅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는 ‘독도의용수비대’라는 현대판 의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독도를 지키고 있는 경북경찰청 소속의 독도수비대가 창설되기 전, 독도의용수비대는 사재를 털어 무기를 마련하고 오로지 온몸을 던지면서 독도를 지켜냈다. 1953년 4월 20일부터 1956년 12월 30일까지 무려 3년 8개월 동안, 그들은 빗물을 받아 마시고 허름한 막사 하나에 의지하면서 버티고 버텼다.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미역을 따다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면서, 갈매기 알을 먹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국가의 눈 밖에 있었던 이 땅을 수호했다. 한국전쟁 막바지였던 그 시기, 일본은 이 땅을 노리고 있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국권을 회복한 직후 일본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독도 영유권 침탈이었다. 독도 곳곳에 팻말을 설치하고 한국의 독도 영주권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팻말 전쟁’이다. 울릉군의 청년 홍순칠은 직접 나서서 독도를 지키기로 했다. 그를 따라 총 33명의 의용수비대가 조직되었고, 그들은 목선 하나에 의지해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며 긴 시간 영주권을 지키려 애를 썼다.
전쟁의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시작한 영토 침탈은 팻말 설치에서 그치지 않았다. 수시로 순시선을 보냈고, 수비원들은 때로 나무로 만든 가짜 포를 동원하고 구식 카빈 소총을 구해 실사격을 가하면서 일본에 맞선다. 일본은 1954년 6차례나 무력 충돌을 감행하면서까지 독도를 향한 야욕을 드러냈다. 독도의용수비대와 일본 간의 치열한 전투의 정점은 1954년 11월 20일 있었던 ‘독도대첩’이었다. 450톤급 순시선 해쿠라호와 오키호가 동시에 독도 양쪽으로 접안을 시도했고, 수비대는 무력으로 맞섰다. 치열한 공방 끝에 해쿠라호가 박격포에 맞아 퇴각했고, 그 이후로 일본은 독도 상륙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는 것은 독도가 가진 여러 가치 때문이다. 동해에서의 영토 확보의 문제부터 해당 수역의 지질학적, 생태학적 가치와 무궁한 지하자원, 막대한 어업자원, 항해권 등의 경제적 가치까지. 이에 더해 군사 전략적 요소로 보아도 독도는 무척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셀 수 없는 유형·무형의 가치가 독도와 연관돼 있다. 지금도 그 발톱은 무뎌지지 않았다.
일본에 맞선 의용수비대의 고난이 어떠했는지는 짐작기도 어렵다. 척박한 돌섬의 해안에 몸을 의탁해 3년 8개월. 최근 울릉군에 문을 연 ‘독도의용수비대 기념관’에 처절했던 당시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독도를 다케시마라 불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버티고 버텨준 덕분에 1956년 내무부 소속의 독도수비대가 창설됐고, 공식적으로 국토 수호의 임무를 띠고 독도의용수비대와 임무를 교환한다. 울릉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해서 활동했던 독도의용수비대를 한국 역사에 기록된 마지막 의병으로 보는 시각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향긋한 산채 나물에 따개비밥 한 술
비단 독도뿐 아니라 화산섬인 울릉도에서 산다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가파른 벼랑이 이어지는 지형에 평야도 많지 않아 먹을 것을 구하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취해야만 했다. 고사리를 비롯한 온갖 산나물을 캐서 먹었고, 바다에서 올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재료로 삼았다. 그런 울릉도의 삶을 대변하는 음식이 따개비밥이다. 갯바위에 서식하는 따개비는 크기도 작고 무척 단단해서 채취도 쉽지 않은 생물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울릉도에서 먹는 따개비는 우리가 아는 그 따개비가 아닌 보말 (삿갓조개)이라는 점. 울릉도의 주민들은 보말을 따개비라는 방언으로 부른다. 흔히 보말은 국물을 내는 재료로 각광받지만, 이곳에서는 밥에 넣어서 먹기도 한다. 지금도 울릉도 도동항 곳곳에서 따개비밥이니 따개비 칼국수 등을 만날 수 있다.
현재 울릉도 내에는 따개비밥을 취급하는 식당이 적지 않지만, 울릉도에서 나는 따개비 (삿갓조개)만 쓰는 집은 서너 집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중 따개비밥으로 잘 알려진 '돌섬식당'을 찾았다. 이 집의 박인수 사장은 “따개비는 전복의 사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양소가 풍부하다고 해서 예전부터 울릉도 주민들이 죽을 끓이는 재료로 많이 썼다.”며 “한동안 따개비밥은 잘 먹지 않는 음식이었는데, 최근 주목을 받으면서 울릉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문을 넣으면 밑반찬부터 깔아주는데 개중에는 산채의 비율이 낮지 않다. 그중에서도 입맛 돋우는 일등 공신은 부지깽이 절임이다.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명이나물도 원래 울릉도 특산이었고 부지깽이 절임과 똑같은 방식으로 절여서 먹었다. 부지깽이 절임을 들어 입에 넣었다. 쌉싸름한 향이 입안을 싹 가셔준다. 쓴맛의 끄트머리로 살포시 단맛이 올라온다. 부지깽이 한입에 식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함께 내어준 취나물은 또 어떤가. 향긋한 취의 향이 봄날의 싱그러움을 혀끝에 가져다준다. 이외에도 찬 하나하나가 정갈하다.
더는 기다리기 어렵다 싶을 무렵, 따개비밥이 나왔다. 적당한 크기의 그릇에 공깃밥 한 그릇 분량보다도 많이 담겨있고 그 위에 김 가루를 뿌려두었다. 따개비 살점이 밥알 사이사이마다 콕콕 박혔다. 들기름과 간장으로 비벼서 나온 그 밥을 더 기다릴 여력이 없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쓱. 작은 따개비가 밥알 뒤에서 쫀쫀하게 씹힌다. 그 옛날 울릉도 사람에게 따개비는 어떤 존재였을까. 어쩌면 억척스러운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고마운 식재료는 아니었을까. 이 땅을 지키고 이 땅에서 살고자 했던 그네들의 삶이 온몸으로 스며온다. 따개비밥은 그 끈질긴 생명력을 대변하는 맛이 아닐까. 식당에서 나와 마주한 울릉도의 바다가 푸르게 넘실대고 있었다.
삿갓조개 (보말)은 고동처럼 바위에 붙어살며 1~3센티미터 정도 크기로 성장한다. 아르기닌 (arginine) 성분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혈류량을 좋게 하고 근육 발달을 돕는다. 또 남성의 스태미나에 좋고 고단백 타우린 (taurine) 성분이 많아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며 고지혈증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간 해독 및 보호에도 좋다.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에게 권할 만하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