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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사로운 봄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을 반복하기에는 바깥세상이 너무나 찬란했다. 강원 강릉으로 차를 몰았다. 가족과 함께하기에 강릉만 한 여행지도 없다.



300년 10대를 이어 온 99칸 사대부의 집


강릉이 데이트 코스나 가족 여행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분명 도로 인프라에 따른 변화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강릉까지 가는 데는 다섯 시간 이상을 각오해야 했다. 이제는 서울에서 양양까지 두 시간 남짓, 강릉까지는 두 시간 반이면 족하다. 퇴근 후 차를 몰아 훌쩍 떠나도 강릉 바닷가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게 가능할 만큼 가까워졌다. 심지어 원고를 쓰다가도 턱 막혀서 좀처럼 손이 나아가지 않는 날이면 밤늦게 차를 몰아 강릉으로 향하기도 했다. 새벽 서너 시에 출발하면 동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볼 때쯤 바닷가에 도착한다. 수평선 위로 붉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엉켜 있던 수많은 문장의 실타래가 순식간에 지워지곤 했다. 그러고 나서 자리에 앉으면 막혔던 글이 풀려나갔다. 강릉은 한동안 무척 애정하는 여행지였다.


근래에는 꽤 오랫동안 강릉을 찾지 않았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구태여 강릉을 찾을 일이 없었다. 이제는 강릉을 찾는 사람이 꽤 많아져 상대적으로 사람이 덜 몰리는 곳을 찾아다녔던 것도 이유가 됐다. 이름 좀 알려졌다 싶은 곳은 여지없었다. 일출을 보고 한적하게 아침식사를 즐기던 식당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이 몰려드니 자연스럽게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그렇게 꽤 긴 시간 강릉을 잊고 살다가 “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오랜만에 강릉을 떠올렸다. “기왕이면 오래된 한옥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게 어떨까?”라는 제안에 가족 모두가 흔쾌히 “그래!”를 외친다. 더 고민할 것 없이 길을 나섰다. 몇 년 사이 강릉은 서울에서 훌쩍 더 가까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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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두었던 곳은 강릉의 선교장이었다. 강릉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선교장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선교장은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경국대전>에 따라 왕이 거주하는 궁궐이 아닌 다음에야 지을 수 있는 최대의 크기는 99칸이었다. 반가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의 규모로 집을 지었다는 건 강릉 일대에서 이 집의 세를 보여주는 방증이 됐다. 그만큼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이 1703년에 처음 지었다. 효령대군은 세종대왕의 형으로 아버지 태종의 뜻을 따라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한 인물이다. 강릉 선교장을 지은 이의 뿌리는 왕가인 전주 이씨인 셈이니, 이만한 세를 과시하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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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가옥이 지금까지 10대를 이어가며 온전히 보존되어 왔다는 점일 테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이만한 고택 찾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이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행랑채에서 맞이하는 아침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배다리’라는 뜻인데, 이 집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자못 궁금했다. 자료를 찾다 보니 바닷물이 육지 속에 가둬져 만들어진 경포호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예전에는 경포호를 가로질러 배를 타고 다리를 건너듯 건너다녔다는 이야기가 남았다. 배를 다리로 삼다, 그래서 배다리다. 아마도 그 시절에는 바로 건너까지 호수가 들어왔던 모양인데, 지금은 그 자리를 메워 논으로 만들었고, 그 안쪽으로 경포호 생태저류지가 남았다. 대신 고택의 초입인 활래정의 인공 연못이 있어 단아한 한국 특유의 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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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과 관련해서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더 전해온다. 처음 이 집의 부지를 정할 당시에 있었던 사건으로 원래 이내번이 처음 살던 곳은 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원래 충주에서 살다 강릉으로 옮겨왔는데, 염전을 일궈 돈을 꽤 모은 그가 새 집터를 구할 때 족제비 떼가 나타났다고. 그 족제비들을 따라오니 살던 곳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소나무밭이 있었고 이 자리가 기가 막힌 명당이었다고 전한다. 물론 족제비 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 자리에 새집을 세운 이후로 그의 일가는 번창일로를 걸었는데, 그 뒤로 선교장은 족제비가 정해준 집터라는 이야기가 늘 따라다닌다.


이곳은 집이 워낙 커서인지 늘 손님이 많았던 모양이다. 관동팔경의 명성을 좇아 여행을 온 손님은 으레 선교장의 행랑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침 가족이 함께 하룻밤을 청할 공간이 행랑채다. 선교장은 공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데 행랑채는 7만 원 정도로 가격도 저렴하고 공간도 넉넉하다. 행랑채 끝쪽에 샤워실과 화장실도 마련돼 있는 데 아주 깔끔한 편이라 불편함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다소 차가운 밤공기를 걱정했지만, 한옥의 단점인 외풍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잘 가꾸고 세세한 곳 하나까지 신경 써 가며 300년을 유지한 집이라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두툼한 침구류도 푹신해서 몸을 누이기 좋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게스트하우스나 모텔 같은 숙박업소를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소나무밭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공기에 머릿속까지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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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데리고 선교장 이곳저곳으로 산책하러 다녔다. 맞은편 사랑채와 마당의 키 작은 배롱나무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동별당을 지나 열화당을 둘러보고 서별당까지 걸어서 지나치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낀다. 한옥 특유의 단정한 선과 색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마침 곳곳에 꽃이 피었다. 화사한 아침 햇살에 하얀 꽃잎이 빛난다. 봄이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이 어여쁜 광경을 가까이서 누릴 수 있으니 고택에 보낸 하룻밤은 마냥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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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두부는 바다의 선물?


강릉은 볼거리만큼이나 먹을 것도 많은 동네다. 인터넷 검색창에 ‘강릉 맛집’ 네 글자를 넣으면 주르륵 온갖 산해진미가 쏟아진다. 대부분 근래에 새로 생긴 집이 많고, 한식보다는 양식이거나 누군가가 개발한 퓨전 먹거리다. 이런 부류의 먹거리는 최근 강릉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월화거리와 강릉중앙시장에 많이 몰려 있다. 어떤 걸 선택해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것들이지만, 그래도 강릉의 아침이라면 마땅히 두부를 먹어야 하지 않을까.


두부는 강릉에서도 역사가 꽤 오랜 음식이다. 강릉의 두부를 두고 꼭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허난설헌과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이다. 그가 한때 강릉에 살면서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었다는 설이 마치 정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강릉의 두부를 말하는 ‘초당’이라는 단어도 허엽의 호에서 비롯했다는 설이다. 여기에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사대부가 ‘잡일’인 두부 만드는 일을 과연 했겠느냐는 주장이다. 진위는 알기 어렵다. 구태여 무엇이 정답인지 따질 생각도 없다. 다만 이곳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전쟁 중에 두부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집이 한두 집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에 두부 만드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었다는 증언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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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것이라고 두부 만드는 법이 크게 다른 건 아니다. 예부터 두부란 콩물을 굳혀서 만드는 음식이다. 두부라는 이름의 대전제는 바로 그것이다. 불린 콩을 갈고 이를 끓여서 굳혀 만드는 것. 다만 콩물을 굳히기 위해 바닷물을 쓴다는 게 강릉의 특징이라고 할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강릉만의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조심스럽다. 콩물을 굳히기 위해서는 광산에서 나는 황산칼슘이나 천일염에서 빠져나온 간수가 필요하다. 간수에는 마그네슘과 칼슘이 많았으니 콩물을 굳히기 좋은 재료였을 게다. 그러나 천일염 제조법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결국 그 이전에는 두부를 만들기 위해 다른 방법을 썼을 텐데, 그게 바로 바닷물이었을 거라는 추정이 힘을 얻는 상황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바닷물을 섞어 콩물을 굳혔을 거라는 말이다.


앞뒤를 따지자면 해야 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강릉에서 바닷물로 두부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거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동해 바닷물에 마그네슘과 칼슘이 많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적어도 강릉에서만큼은 두부마저도 바다가 주는 선물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강릉의 아침에는 초두부


지금 초당 마을에서 두부를 전문으로 하는 집은 대략 20여 집이다. 집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불려놓은 콩을 갈아 콩물을 뺄 때 쓰는 삼베 천의 개수도 서로 다르고 콩물을 굳히기 위한 바닷물 (간수)의 비율도 제각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집은 ‘토박이할머니집’이다. 어느 집이나 두부를 만들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불린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들기 시작한다. 콩물이 어느 정도 응고되어 두부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는 상태를 순두부라고 하지만, 이 마을에서는 ‘초두부’라고 부른다. 보들보들하고 고소한 콩물의 맛. 그 뒤로 슬며시 밀려들다 흩어지는 듯한 절묘한 끝 맛. 이를 바다의 내음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그리 믿고 싶을 만큼 독특한 매력이 있다. 초두부만큼은 여느 두붓집에서 먹은 순두부와 비교해도 우위를 점할 듯했다. 양미리 조림이며 고춧가루의 칼칼한 맛이 날카롭게 입안을 훑고 가는 김치까지 어느 것 하나 아쉽지 않을 만큼 반찬도 훌륭하다. 그럼에도 초두부가 주는 순정한 맛은 절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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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두부가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양을 잘 잡아서 만든 따뜻한 모두부는 초두부와 다른 고소함이 있어 자꾸만 손이 간다. 두부김치라는 메뉴를 별도로 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강원도 특유의 칼칼한 김치와 이 집의 모두부는 궁합이 좋다. 어린아이들은 순한 맛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 집에서만큼은 아니다. 두부의 고소함, 마지막에 입안으로 감도는 달큰한 맛은 어린아이마저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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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으로 나온 비지는 또 어떤가. 콩물을 내리고 남은 콩 찌꺼기여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렇다면 이 집의 비지를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비지에 새우젓만으로 간을 해서 내주는데, 전골보다 손이 더 많이 간다. 미학을 논할 때 어떤 분야든 최상의 경지에 오르면 가장 단순한 것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두부야말로 그 문장에 걸맞은 음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 이런 음식은 먹을 때가 가장 좋다. 그 맛을 되새겨 글로 쓰는 지금이 가장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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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은 적고 신체 기능에 필요한 단백질은 많은 두부는 나트륨과 콜레스테롤이 거의 없어 심장에도 좋은 식품이다. 두부를 굳히는 과정에서 다량의 칼슘이 들어가 뼈 건강에도 좋다.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한 식품으로 권할 만하다. 대표적인 고단백질 식품이어서 아미노산도 풍부하다. 두부 반 모만 먹어도 단백질 하루 권장량 15%를 섭취할 수 있다. 체내 콜레스테롤 침전물을 분산시키거나 제거하는 기능을 해서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칼로리가 적다는 점은 두부가 다이어트 식품으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포만감을 유지할 수 있고 영양분이 풍부해 다이어트 중 필수로 섭취해야 할 식품이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