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로 향하는 길은 마음먹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거리도 거리지만, 유난히 심리적 거리가 먼 것도 한몫 제대로 한 탓이다. 크게 마음먹고 떠난 늦겨울 완도, 그곳에서 선물 같은 여행을 즐겼다.

가슴을 물들이는 청록빛 바다

“꼭 시간 내서 내려오시게. 철이면 철마다 볼 거 많고 먹을 것도 많은디, 맛난 거 사줄라니까 얼굴 좀 한 번 보여주시게 동상!”

이 얘기를 수년째 듣고 있던 참이었다. 매년, 철마다. 몇 년 전 중국여행을 함께 했던 분인데, 어머니와 나이가 엇비슷한 연배임에도 형과 동생의 인연을 맺었다. SNS로 수백 킬로미터에 떨어진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때로 타박도 놓으며 “대체 언제쯤 내려올 거냐?”는 요구를 줄기차게 하시던바, 이번에는 꼭 가겠노라고 덜컥 약속을 해 버렸다. 다행히 해남-완도로 이어지는 취재가 배당되어 그 약속을 지키게 됐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떠나는 길은 매번 가슴이 설렌다. 서해나 동해에서는 보기 힘든 청록빛 바다 때문이고, 발길 닿는 곳마다 당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먹거리 때문이다. 남도는 여행자에게 매 순간 갈등을 선사하는 지옥 같은 파라다이스다.

말이 나온 김에, 남도에 발길이 뜸했던 건 내 탓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여행의 인연이라는 건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다녀온 곳인데도 두 번 세 번 숱하게 다시 가는 지역이 있고 좀처럼 기회가 생기지 않는 지역이 있다. 전라남도의 끝자락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일정이 틀어지거나 여건이 맞지 않는 경우가 이어지는 후자의 경우다. 그러니 아직 인연이 덜한 탓이지 내 탓만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한다. 변명 같겠지만.

그럼에도 남도로 가는 길, 여전히 바다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나주와 영암을 지나 해남으로 들어서니 이미 봄이 완연하다. 해남에서 잠시 들렀던 집에서는 보름 전부터 매화가 피었다며 녹차 위에 매화를 동동 올려서 준다. 차에 더해진 매화의 향기가 청량하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땅끝을 곁에 두고 다리를 건너 완도로 들어섰다. 창밖으로 바다는 계절이 바뀌거나 말거나 묵묵히 들고 나면서 제 일만 충실하다.

완도의 번화가는 동남쪽 끝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래 봐야 완도로 들어가는 다리부터 그곳까지 20여 분이면 충분하다. 청산도니 여서도니 모두 이곳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야 하고 제주도로 향하는 쾌속선도 완도읍의 여객선터미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한 시간 반이면 닿는 제주도라서 배를 타고 그대로 건너 가볼까도 잠시 고민했었다.

완도읍의 바닷가에 서면 바다 건너 자그마한 섬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슬을 닮아 주도라 불리는 섬으로 17,355제곱미터 (약 5,200평)의 섬 안에 상록활엽수와 낙엽수 등 13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한다. 이쪽에서만 볼 수 있는 붉가시나무, 돈나무, 구실잣밤나무, 광나무 등 서로 다른 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군락을 이룬다. 서남해안의 식생을 연구하기 좋은 표본이어서 천연기념물 제28호로 지정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면 벌 받는다는 얘기다.

국내 최대의 난대림, 완도수목원

완도에서 무얼 볼까, 어디로 갈까, 한참을 고민하다 완도수목원으로 향했다. 아무리 섬이어도 완도는 제법 볼 게 많은 곳이다. 섬에서 다른 섬으로 건너간다면 더 볼 게 많다. 알려진 것도 많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완도수목원 역시 널리 알려진 듯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완도의 명소라는 판단이 들었다. 따스한 기후 덕에 이 수목원은 국내 최대 규모의 난대림이자 국내에서 유일한 난대 수목원으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한반도의 산은 변화무쌍한 변화를 겪는다. 근현대사에는 더욱 그랬다. 완도수목원이 있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민둥산이 될 만큼 황폐했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 시대 정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완도는 숯을 만들어 공납을 올리던 섬이었다. 조선 말엽에 접어들면서는 난대림 벌채권을 일본에 넘긴 탓에 울창한 숲이 무참하게 베어졌다. 석탄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땔감이나 숯을 만들기 위해 다시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런 시절을 지난 끝에 간신히 되살아난 게 지금의 완도군 군외면 일대의 난대림이다.

이 수목원은 총면적이 2,050헥타르(약 620만 평)에 달한다. 그 안에 난대성 희귀식물 770종을 비롯해 4,150종의 식물군이 자란다. 종의 다양성을 이만큼 다양하게 유지하고 있는 숲은 국내에서도 매우 드물다. 특히나 난대성 기후에서 자라는 황칠나무와 붉가시나무 같은 종은 희귀종이어서 그 가치가 더욱 특별하다. 붉가시나무는 완도수목원 전체 수종 중에서도 60퍼센트를 차지한다. 워낙 밀도가 좋은 나무여서 질 좋은 목재였고, 화력 좋고 열이 오래 지속돼서 숯의 재료로도 애용했단다. 완도가 숯을 공납하던 섬이었던 이유다.

수목원을 둘러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코스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대여섯 시간씩 머무를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이 택하는 코스는 중앙관찰로를 따라 아열대온실과 산림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다. 이게 가장 짧은 한 시간짜리 코스다. 아직은 겨울의 기색이 완연하게 버티는 시절이라 수목원의 진가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한 3~4월이면 이곳도 전혀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푸른 잎사귀가 피어나고 곳곳이 꽃으로 단장한 채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겠지.

수목원에서 아열대온실은 꼭 한 번 들러볼 가치가 있다. 열대와 아열대 식물 500여 종이 자라고 있는데, 사진으로만 보던 온갖 종을 만난다. 특히 색색으로 치장한 새의 머리를 닮은 극락조화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돌아오는 길에 들르게 되는 산림박물관은 웅장한 외관이 멋지다. 전통 한옥의 모습인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교토의 기요미즈테라를 연상케 한다. 내부 중정은 완벽한 한옥의 양식을 따른다. 회랑을 따라 각종 전시실을 둘러보도록 해 놓았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다.

한 상 가득하게 차려낸 완도의 맛

마침내 지인을 만났다. 몇 년 만의 만남인데, 차에 오른 형님의 첫 마디가 꽤 시크하다.

“직진. 가자.”

주문대로 차를 몰다가, 이내 둘 다 웃음보가 터졌다.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웬 상남자 코스프레인가 말이다. 살가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 사는 이야기는 SNS로 지켜보고 있었으니, 질문보다는 주로 가고 싶은 여행지 이야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자리라는 게 대체로 이렇다.

우리가 간 곳은 완도중앙시장이었다. 시장 입구에 자리한 진미횟집. 계절의 별미 삼치회를 사주겠노라고 했다. 늦가을부터 한겨울까지 남도의 바다에서는 삼치회를 첫손에 꼽는다. 5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커다란 녀석일수록 맛이 제대로 드는 횟감이자, 선어로 즐길 때 그 감칠맛이 온전히 느껴지는 음식이다. 펄떡이는 생선을 그 자리에서 잡는 활어는 쫄깃한 맛으로 먹지만, 일정 시간 저온으로 숙성하는 선어는 회 자체의 감칠맛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생명이다. 주문이 들어가고 도마 위에 삼치 덩어리가 올랐다. 그냥 봐도 미터급 삼치였다. 능숙한 손길로 회를 자르고 담아 한 상 그득하게 내온다. 젓가락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군침이 넘어가고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회 먹는 방법이야 사람마다 다른 게 정상일 테다. 흔하게는 간장에 찍든가 초장에 찍어 먹지만, 이곳은 다르다. 파를 쫑쫑 썰어서 함께 담아낸 양념장에 콕 찍어 김에 싸서 먹는다. 따뜻한 밥 약간에 마늘이나 고추를 올리고 된장을 살짝 덜어서 함께하면 금상첨화다. 중요한 건, 삼치회에 더하는 어떤 요소도 회가 품은 본연의 맛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칠맛을 살리거나 회 특유의 기름진 뒷맛을 말끔하게 잡아주거나. 회는 재료가 가진 맛을 최대한 잘 느낄 수 있어야 맞는 거 아니냐는 말에 손뼉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회만으로도 양이 상당한데, 굴매생이국이 나왔다. 물을 넣지 않고 매생이에 열을 가해 머금고 있는 수분을 끌어내서 끓이는 게 매생이를 제대로 요리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다시 한번 박수. 잠시 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뭐가 또 나온다. 이번에는 뼈에 붙은 살을 구워서 내왔다. 삼치 갈비라 해도 좋을 만큼 살이 많고, 고소하다. 역시 그릇 위에 가득 쌓여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족히 한 끼는 때울 지경이다. 제아무리 먹성이 좋고 뱃구레가 커도 그 한 상을 다 먹는 건 불가능했다.

청정한 바다에서 가져온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는 동안 이제야 완도에 온 걸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 배길 방도가 없었다. 후회하면 뭐하나, 이미 지나간 일인걸. 한 번 와서 진가를 봤으니 조만간 다시 내려오면 되겠지. 기왕이면 아침부터 굶고 내려가야겠다. 완도의 그 귀한 한 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하루쯤은 공복을 견뎌낼 테다.

삼치는 고등어, 꽁치와 함께 대표적인 등푸른생선이다. 오메가-3 지방산인 DHA가 100g당 1,288㎎ 수준으로 많아 태아의 두뇌 발달을 돕고 노인의 치매 예방, 기억력 증진, 암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삼치의 불포화지방산은 혈관 내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배출시킬 뿐 아니라 콜레스테롤 생성을 억제하는 효능도 갖고 있다. 따라서 혈관 건강과 성인병 예방에 좋다. 칼륨도 많아 고혈압 예방에도 도움을 주지만, 지방이 많아 다이어트를 생각한다면 지나친 섭취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