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한 발짝 깊숙하게 다가왔기에 경기 파주로 차를 몰았다. 기러기가 날아드는 철책 바로 곁에 황희 정승의 발자취가 있었고, 오랜 손길로 장어를 다듬는 식당이 있었다.
청백리의 표본이었던 선비의 마지막 자취
계획했던 여행은 아니었다. 둘째 아이의 생일을 맞아 함께 밥이라도 먹자는 모친의 제안에 길을 나선 길이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 불과 40여 분이면 닿는 그곳에 철책이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파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완연한 겨울 풍경이었다. 머리 위로 날아드는 철새의 행렬과 추수를 끝낸 논이 자아내는 짙은 공허함. 운전대를 잡고 천천히 달려가는 내내 겨울이 주는 황량함에 몸을 움츠렸다.
경기 파주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임진각 평화누리’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파주, 문산, 전곡 일대는 꽤 많은 여행지가 숨어 있음에도 한국전쟁이 갈라놓은 철책의 이미지를 좀처럼 벗어던지지 못한다. 기껏해야 임진각 평화누리 정도. 예정해 둔 식당 곁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반구정’이 제법 반가웠던 건 그 때문이다. 반구정은 조선 초기 청백리의 표본이 되었던 황희 정승의 흔적이다. 오랜 기간 조정의 관직을 살았던 그는 말년에 이곳에 몸을 의탁하며 지냈다. 반구정은 그가 임진강의 물살을 벗 삼아 지내던 정자다.
반구정의 뜻이 궁금했다. 그 이름이 왠지 낯익다. 울진 ‘반구대’를 떠올리게 한다. 반구대는 산기슭이 물가로 달려가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어서 소반 반(盤)에 거북 구(龜)를 쓴다. 반면 파주의 반구정은 짝 반(伴)에 갈매기 구(鷗)다. 쉽게 풀어 이해하자면 물새를 벗 삼는 정자라는 의미가 된다. 반구정이 앉은 곳은 임진강가의 제법 높이 솟아오른 구릉 위다. 임진강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반구정만 있는 건 아니다. 이 일대를 ‘황희 정승 유적지’라고 이름 붙여 두었다. 반구정 곁으로 ‘앙지대’라는 또 다른 정자가 있고, 뒤편 너른 지대 위에 ‘고직사’와 ‘월헌사’, ‘방촌영당’, ‘경모재’ 등의 전각이 있다. 입구 쪽으로는 ‘방촌기념관’이 있어 황희 선생과 관련한 여러 기록을 모아두었다. 방촌은 황희의 호다. 황희 정승 유적지는 이 주변으로 나왔다면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에 알맞다. 부러 들렀다 가도 나쁘지 않을 만큼 잘 정돈된 곳이다.
황희라는 이름에는 당연한 듯이 ‘정승’이라는 단어가 따라붙는다. 그만큼 그는 정승이라는 고관의 표본이었다. 원래 개성에서 태어나 고려의 관리로 일했으나 1392년 고려가 한 많은 시대를 마감하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으로 숨어들었다. 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새로운 나라의 시조가 된 이성계에 분노한 고려의 마지막 관리 72명이 함께였다. 그들은 두문동으로 들어가는 모든 길에 빗장을 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세상에 인연을 끊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면서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유능한 신하가 절실했던 태조 이성계의 어떤 설득도 허사였다. 이 사건에서 비롯한 고사성어가 ‘두문불출’이다.
반구정에 올라 절감한 시대의 비극
황희 역시 그들과 뜻을 함께하고자 했다. 요지부동이던 그가 뜻을 꺾고 세상으로 다시 나온 건 두문동에 함께 숨어든 다른 이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백성을 위해서라도 젊은 인재는 세상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고 황희를 설득했고, 결국 그는 다시 세상에 나와 이성계에게 힘을 보태게 된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조선이라는 새 시대에 발을 디딘 그는 그토록 염원하던 인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조선의 기틀을 다졌고, 6조의 판서를 역임하며 선비의 나아갈 방향이 되었다. 한때 태종의 뜻을 강력히 반대해 결국 전북 남원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해 강직했으며, 쉽사리 불의와 타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사에서 보듯 “네 말이 옳다, 네 말도 옳구나, 자네 말도 옳다.”라던 유하고 품 넓은 선비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쟁점을 두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가려 인정하며 접근하는 화쟁(和爭)의 방식일 뿐, 그는 한편으로 너그러웠지만, 한편으로 대쪽 같은 선비 중의 선비였다. 방촌기념관 곳곳에서 만나는 그의 글씨에서 그런 그의 성품이 오롯하게 드러난다.
따사롭게 떨어지는 햇살을 맞으며 유적지 곳곳을 걸어 다녔다. 몇백 년 전 황희가 머물던 시절의 흔적이라면 상당한 시간의 더께가 묻어 있을 법한데도, 좀처럼 그런 고택의 기운은 보이지 않아 아쉽다. 그러나 이는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다. 전쟁 당시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던 임진강 주변은 초토화되어 버렸다. 황희 정승의 흔적 역시 그 시절 불타 사라졌다. 그 뒤 이 근방에 거주하던 후손들이 손을 모아 반구정을 복구했다. 새로 지어진 전각마다 시대의 명필이었던 일중 김충현 (1921~2006) 선생의 글씨가 남았다. 외유내강의 전형을 보여주는 글씨체가 황희의 성품과 썩 잘 어울리는 듯하다.
반구정에 서서 임진강을 바라봤다. 전쟁의 상흔은 아직 뚜렷하다. 정자 아래로 촘촘한 철조망이 끝 모르고 이어진다. 강물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서 유유히 흐르는데, 손 한 번 담가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다. 그 너머는 민간인 통제구역. 콩으로 유명한 장단 지역이고 맞은편 산 너머가 비로소 개성이다. 저 너머에 개성공단이 있다. 왼편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능선은 개성의 송악산이고 오른편으로 강의 이쪽과 저쪽을 잇는 다리는 도라산역으로 향한다. 황희가 누렸던 노년의 여유로움은 이 시대에는 아직 기대하기 어렵다.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실포실한 장어의 맛과 향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로 들어간다. 황희 정승 유적지 바로 곁의 ‘반구정 나루터집’. 임진강 변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허름한 장어집을 상상했다가 초입부터 압도되어 버렸다. 고관대작의 거처를 연상케 할 만큼 으리으리한 규모의 한옥이 떡하니 놓여있다. 안쪽으로는 너른 공간을 반듯하게 나누어 십수 개의 방으로 꾸몄다. 이만한 규모의 장어집이 전국 어디에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민물장어로 소금구이와 양념구이를 내주는데, 구운 정도가 딱 알맞다. 지나치게 익어 살이 부스러지지도 않고, 덜 익어 질기지도 않게 익혀냈다. 보통의 솜씨가 아니다. 방 밖으로 장어를 구워내는 구이대가 늘어서서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숯불에 올린다. 착착착,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감탄스럽다. 여러 명이 마치 한 몸처럼 익히는 시간과 자르는 타이밍, 담아내는 손길이 절묘하다. 손님이 직접 구워 먹는 것이 아닌 만큼 장어의 탄력과 맛을 온전히 살렸다. 가격은 250g을 1인분으로 5만 원. 비싸다면 비싼 가격이지만, 숙련된 직원이 구워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느 이름 높은 집과 비교해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집의 음식은 반찬부터 메인 요리까지 조미료 사용을 자제했다는 게 느껴진다. 조미료의 사용을 자제하고도 각기 다른 손님의 취향을 맞추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만족할 만한 한 상을 즐길 수 있다. 이 집의 또 다른 메뉴인 메기매운탕도 추천이 아깝지 않다. 역시 화학조미료의 감칠맛보다는 고춧가루나 다진 마늘 같은 일반적인 양념의 힘으로 매운탕의 맛을 잘 끌어올렸다. 어린아이도 망설임 없이 먹을 만큼 매운 정도도 순한 편이다. 그럼에도 민물고기 특유의 잡내와 흙냄새를 잘 잡았다. 한겨울 몸과 마음이 처진다면 임진강 변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수없이 기쁨과 아픔의 시절을 반복하는 인간사의 격랑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저 강물에 위로받고, 허기진 몸을 추스를 만한 여행지가 가까이에 있다.
장어는 산란 과정이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도 완벽한 양식이 불가능하며, 오직 치어를 잡아 키우는 부분 양식만 가능하다. 그만큼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은 생물이다. 예부터 스태미너에 좋은 음식으로 주목받았고, 단백질과 비타민 A가 다량으로 함유돼 있어 기력이 떨어질 때 섭취하면 회복에 도움이 된다. 일본에서는 복날이 되면 보양식으로 장어를 즐겨 먹는다. 특히 혈액순환이 잘 안 되거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에게 장어는 좋은 식재료다. 장어의 불포화지방산은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콜레스테롤이 혈관에 쌓이는 것을 막아준다. 또 칼슘, 단백질, 뮤신 (mucin) 및 각종 비타민이 골고루 함유돼 있어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필수지방산인 DHA와 EPA 등도 풍부해 뇌 기능 활성에 도움을 준다. 따라서 한창 공부할 나이의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좋은 음식이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