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지에 대한 편견이라는 게 참 무섭다. ‘시화공단’이라는 그림자가 어찌나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지, 직접 대면한 경기도 시흥 앞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편견이 깨지다
며칠 전부터 걱정을 했다. 경기도 시흥으로 여행을 간다니 주변은 대체로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거기 볼 게 있느냐는 식이다. 게다가 워낙 비구름을 몰고 다니기로 유명한지라 날씨 또한 안심할 수 없었다. 사전에 자료를 찾고 이미지를 검색하면서 나름의 준비를 끝냈다. 생각보다 시흥이라는 도시는 알려지지 않은 매력이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다. 이른 아침 차를 몰고 나서는 길. 날씨마저 화창하다. 가을다운 가을. 청명하고 높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 시작부터 좋았다.
시흥은 바다를 곁에 둔 해안 도시다. 여행지로 각광받는 곳은 아니어서인지 해안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지 않지만, 사실은 경기도 유일의 내만갯벌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희귀한 갯골을 가진 도시이기도 하다. 갯골의 사전적 의미는 갯고랑이다. 수십만 년 동안 밀려든 바다는 육지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오고 쓸려나가며 육지에 고랑을 깊게 냈다. 그 크기가 제법 넓은 하천에 비교해도 될 만큼 규모가 크다. 일반적인 민물 하천과 다른 점이라면 밀물과 썰물에 맞춰 육지 깊은 곳까지 가득 밀려왔던 바다가 하루에 두 번씩 쑥 빠져버린다는 것. 바닥을 온전히 드러낼 만큼 조수 간만의 차가 크다. 교과서에서 수없이 들었던 조수 간만의 차를 한눈에 확인하기 좋은 게 갯골이기도 하다.
갯골이 있다는 건 육지 안쪽에 갯벌이 형성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만갯벌이라는 말의 의미다. 순천만이나 강진만에도 내만갯벌이 있지만, 시흥의 갯골과는 다른 느낌이다. 어떤 면에서 시흥의 갯골은 훨씬 드라마틱한 풍경을 빚어낸다. 그 풍경을 마주할 대표적인 곳이 갯골생태공원이다. 이 공원 부지는 150만 제곱미터 (약 45만 평)에 달한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염전이 만들어졌고 여기서 생산한 소금은 경부선과 수인선을 따라 일본으로 반출해 나갔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소금을 생산했지만, 1995년 수인선이 사라지면서 염전도 문을 닫았다. 기능을 상실한 땅은 한동안 방치됐지만, 갯골에 스며있는 생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2월 국가 해양습지보호지역 지정이 계기였다.
갯골 주변은 해양 습지 생태의 보고다. 농게, 칠게, 망둥어 등 갯벌 생태가 살아 있어 이를 먹이로 하는 온갖 철새가 찾아온다. 퉁퉁마디, 나문재, 칠면초처럼 소금기 많은 땅에서 자라는 염생 식물군도 붉은 빛깔을 뽐내며 자생한다. 무엇보다 발밑에서 살아 움직이는 갯벌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어서 인기 만점이다. 80년 넘은 염전의 역사를 온몸으로 보여 주는 소금창고는 이색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갯골생태공원의 랜드마크는 흔들전망대인데 6층 22m 높이의 목조로 지었다. 바람이 불면 최대 4.2㎝까지 흔들린다. 충분히 안전하게 설계했기 때문에 겁낼 필요는 없다. 6층 꼭대기에서는 갯골을 둘러싼 너른 습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곳곳에서 만나는 낭만과 예술의 공간
갯골생태공원이 새로 거듭나는 시흥을 상징한다면, 월곶포구는 과거와 현재가 기묘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경관부터 무척 독특하다. 널따란 포구 맞은편으로 배곶신도시의 아파트가 섰다. 바다에 뜬 작은 어선과 고층 아파트가 한 프레임에 들어가는 묘한 대비. 월곶포구는 갯골의 시작점이자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한 어선이 모여드는 주요 포구였다. 그러나 갯골을 따라 쓸려온 퇴적물이 쌓여 이제는 포구의 기능을 상실했다. 더 이상 어선은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는다. 몇 척의 어선만 둥둥 떠 있을 뿐. 그 포구의 물이 빠져나가면 바다는 흑갈색 맨살을 드러내놓는다. 그 위로 온갖 갯벌 생물이 터전을 잡았고, 그 뒤를 알락꼬리마도요, 백로, 괭이갈매기 따위가 총총걸음으로 쫓는다.
이름만 남은 포구는 북적이는 활기를 잃었지만, 그 자리에 낭만과 예술을 채웠다. 곳곳에 조형물을 세웠고 낙조를 감상하는 전망대를 지었다. 한때 포구의 중심이었을 공판장은 예술공판장이 됐다. 어부 대신 아티스트가 그곳으로 모였고 업사이클링 예술로 내부를 채웠다. 시흥 주민은 이곳에서 때로는 전시를 보고 때로는 공연을 보며 때로는 쿠킹클래스도 듣는다. 더없이 좋은 복합 문화공간이자 주민 자치시설이다.
시흥의 여행지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오이도. 아주 오래전 규모 있는 섬이었던 이곳은 수백 년에 걸쳐 간척사업을 거듭하면서 육지가 됐다. 오직 이름에서만 과거의 섬이 남았다. 그래도 너른 갯벌을 가졌기에 지금도 조개가 많다. 당초 오이도가 여행지로 각인될 수 있었던 건 조개구이 때문이었다. 풍성한 조개를 찾아 오이도로 향하는 건 비단 현대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사시대 시흥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 역시 오이도에서 조개를 캐 먹었다. 그 흔적이 오이도 곳곳에 패총으로 남아있다. 패총 유적지를 이용해 조성한 선사유적공원은 선사시대의 삶을 오감으로 이해하게끔 잘 꾸며놓았다. 특히 패총 유적과 선사시대 시흥 지역의 모습을 상세히 풀어놓은 패총전시관은 전국 어느 곳의 선사 유적과 비교해도 발군이다.
경기도 시흥은 다른 계절이 아닌 가을에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가을 단풍이 물들어 오기 시작할 무렵이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저물어가는 노을 때문이다. 오이도의 명물 빨간등대 주변 방파제에 올라서면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태양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오이도의 새로운 조형물인 생명의 나무 근처에서는 건너편에 늘어선 인천 송도의 스카이라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파란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태양이 건너편 송도의 스카이라인 사이로 내려앉을 무렵 붉게 타들어 가면 그곳의 모든 사람은 걸음을 멈춘다. 태양의 마지막을 목도하는 순간에는 모두가 입에서 말을 지운다. 시흥이 숨겨놓은 보석 같은 순간이다.
정성 가득한 연 요리 잔치
시흥이 자랑하는 자랑거리 중 하나는 연꽃이다. 지금 이 시기에는 꽃이 저물지만, 수면 위로 연자를 얻을 수 있고 수면 아래로 풍성한 연근을 걷어 올릴 수 있다. 가을에는 시흥의 연 요리를 찾아가야 하는 이유다. ‘장금이’라는 이름의 식당은 시흥을 대표하는 연 요리 전문점이다. 비교적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어 차가 없이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약간은 느즈막한 오후 시간에 장금이를 찾았다. 아직도 자리마다 손님이 가득했다. 단품부터 정식까지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 있는데 이 집의 진가가 궁금하다면 마땅히 정식을 택하는 게 옳다. 정식도 세 가지다. 홍련, 수련, 백련으로 구분돼 있는데 여느 식당처럼 비쌀수록 메뉴가 추가되는 식이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백련 코스를 주문하는 게 현명하다. 맛으로 정평이 나 있는 집이라면, 안 먹은 메뉴가 궁금해서 결국 후회하기 마련이니까.
코스에 딸려 나올 요리는 메뉴판에 상세히 적혀 있지만, 참고만 하는 게 좋다. 이 집은 시기에 따라 제철 식재료로 메뉴를 바꾼다. 전식으로 나오는 타락죽에는 연자를 갈아서 넣었다. 고소한 맛이 입맛을 제대로 당긴다. 같이 나온 물김치는 타락죽의 뒷맛을 말끔하게 잡아준다. 이쯤 되면 더는 기다리기 어려울 만큼 모든 준비가 끝난 셈. 연어초밥 위에 초절임한 연근을 올려서 내주는 연근 연어초밥부터 눈길을 잡아끈다. 거의 모든 메뉴에 연자 혹은 연근이 들어있는데, 단순히 메뉴에 식재료를 첨가한 정도가 아니라 맛의 밸런스를 고려해서 구성한 티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주방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인장이 요리 하나하나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플레이팅에서부터 여실하다. 육류와 해물의 비율도 과하지 않아 좋고 연근 튀김, 연근 샐러드, 연자 약밥 같은 것이 각각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피력한다. 연근이 가진 아삭함과 잘 익혔을 때의 사각거림, 튀겨낸 것의 바삭함이 각기 다른 씹는 맛으로 재미를 준다. 코스의 마지막에 새로 만들어 본 것이라며 내준 연자 모지리도후도 매우 훌륭했다. 연자의 분말을 활용해서 만들어낸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요리였다. 이쯤 되면 연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모여 한바탕 큰 잔치를 벌이는 느낌이다.
모든 요리가 다 나오고 나면 연잎밥과 해물전골이 상의 가운데를 차지한다. 상의 주인공이 바뀌면 뒤를 받쳐줄 밑반찬도 바뀐다. 일곱 가지 종류별 장아찌가 자칫 연향에 물릴 법한 입맛을 다잡는다. 마지막까지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온전히 만족스럽다. 구태여 다른 여행지가 아니더라도 이 푸짐한 한 상은 시흥 가을여행의 충분한 이유가 될 법하다.
연근은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으며 생약으로는 연우(蓮藕)라고도 부른다. 뭉친 어혈을 풀어줄 뿐 아니라 출혈을 멈추는 지혈작용과 열독을 풀고 토혈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다. 생으로 먹으면 설사를 한 뒤에 허해서 나는 갈증을 멈춰주고 쪄서 먹으면 오장을 보하며 하초(下焦)를 든든하게 한다. 쇠해진 기력을 금세 회복하는 데도 효과가 좋다. 연근을 자를 대 나오는 끈끈한 점액질인 뮤신(mucin)은 복합단백질로 세포의 주성분인 단백질의 소화를 촉진한다. 연근의 강장, 강정 작용은 이 뮤신 덕분이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