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마치 환상 속의 나라 같았다. 빙하처럼 청정한 공기, 정갈한 자작나무 숲, 여름밤을 환하게 밝히는 백야, 아날로그 감성의 디자인. 그 무엇보다 핀란드를 정확히 보여주는 수식어는 ‘호수의 나라’였다.
호수에 둘러싸인 북유럽의 관문
핀란드는 북유럽의 허브다. 유럽 항로지만 인천국제공항에서 헬싱키까지 8시간 3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13시간씩 걸리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짧은 비행 거리다. 이게 가능한 건, 러시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북극 항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가는 시간도 짧지만 다른 유럽 도시와 연계하는 항공편이 많다. 자연스레 스톱오버 여행지로 각광받는다.
핀란드의 여름은 꽤 청명하다. 섭씨 20도 미만의 날씨가 쾌적하게 다가온다. 여느 대도시가 그렇듯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흘러간다. 물론 길가 곳곳에 놓인 간이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커피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즐기는 모습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 인상적인 점들도 몇 보였다. 피니시 디자인 (Finnish Design)의 나라답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패션 센스가 범상치 않다. 슈트를 입은 사람들마저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매무새가 눈길을 끈다. 자전거는 헬싱키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이동수단이다. 어딜 가나 인도 바로 곁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마련돼 있다. 길을 걸을 때는 자전거 전용도로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자칫 힘껏 달려오는 자전거와 충돌하기 딱 좋다. 어딜 가든 유모차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핀란드 스탑오버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호수와의 만남이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초대형 호수, 사이마 (Saimaa). 저 멀리 누워있는 수평선과 그 사이사이를 채운 섬들을 대면하고 있으면 크기와 고요함에 압도당한다. 사이마 호수는 넓이만 4,400㎢. 크기가 감이 오지 않는다면 이 호수의 길이를 보자. 그 방대한 규모가 단번에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사이마 호수는 남쪽에서 북쪽까지 500km에 걸쳐져 있다. 평균 수심이 17m, 가장 깊은 곳이 86m에 달한다.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천연 담수호라는 부연 설명도 붙어 있다. 워낙 큰 호수다 보니 그 안에만 14,000여 개의 섬들이 존재한다.
자연을 중시하는 핀란드 사람들답게 호수의 생태계는 완벽하게 살아 숨 쉰다. 핀란드인들에게 사이마 호수의 이미지는 사이마 고리무늬물범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물범은 세계적인 희귀종인 민물 물범이자 멸종 위기종이다. 전 세계에 걸쳐 현재 남아있는 물범의 종류는 총 4종류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이마 호수의 고리무늬물범이다. 현재 200여 개체만 남아 있다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사이마 호수를 즐기는 법
핀란드식으로 호수를 즐기러 떠나는 길. 동부의 도시 미켈리 (Mikkeli)를 거쳐 사이마 호수에 닿았다. 오는 길에 몇 곳의 도시를 거친 터라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사한라티 리조트 (Sahanlahti Resort)에 짐을 풀 수 있었다. 미켈리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숲속의 목조 리조트다. 이곳은 2인용 객실을 비롯해서 최대 5인까지 수용 가능한 빌라도 마련돼 있다. 무엇보다 객실 바로 앞에 사이마 호수가 펼쳐져 있다는 게 장점이다. 짐을 풀고 호숫가에 나와 앉으면 그 고요함에 점점 빠져들어 간다.
리조트 측에서 준비한 저녁을 먹고 사우나를 즐기기로 했다. 핀란드 하면 역시 사우나. 사한라티 리조트의 사우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불을 피워 사우나 내부를 달궈놓고 들어가는 식. 핀란드 사우나를 즐기는 방식은 간단하다. 사우나 한가운데 적잖은 크기로 솟은 철제 난로에 물을 끼얹으면 수증기가 발생하면서 내부 온도가 올라간다. 한참 땀을 빼고 사우나를 나오면 꼭 호수로 뛰어들라고 등을 떠민다. 어스름이 내려온 호수는 이가 덜덜 떨릴 만큼 차갑다. 이 과정을 3~4번 이상 반복하면 되는데, 솔직히 털어놓건대 한 번 뛰어들고 나면 그 뒤로 다시 뛰어들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호수가 시리다.
핀란드에서 식사를 할 때는 매 끼니마다 만나는 물고기가 있다. 흰송어 (Vendace)라 불리는 종인데, 생김새는 꽤 씨알이 굵은 멸치를 빼다 박았다. 사이마 호수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종이라고 한다. 핀란드 사람들은 사이마 호수에서 잡히는 송어류 (trout도 있지만 taimen이라 불리는 대형종도 꽤 많이 먹는다.)를 상당히 많이 먹지만, 그중에서도 흰송어는 식사를 할 때마다 식탁에 올린다. 맛은 상당히 담백하다. 비린내도 없다. 핀란드 사람들은 흰송어를 숯불에 굽거나 다양한 오일에 절여서 먹는데 그 맛이 아주 매혹적이다. 심지어 고소한 번 사이에 끼워서 구워 먹어도 맛있다.
핀란드에서 자주 만나는 식재료는 또 있다. ‘감자와 버섯과 베리의 나라’로 정의해도 될 만큼 감자와 버섯, 각종 베리 류를 많이 먹는다. 핀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감자는 우리가 주로 먹는 분질 감자와 달리 차진 식감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크기나 생김새가 서로 다른 종들을 요리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하는 편이다. 버섯 역시 핀란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식재료다. 숲에서는 식용버섯을 쉽게 채취할 수 있고 그만큼 버섯을 좋아한다. 핀란드에서 다른 무엇보다 눈에 자주 띄는 건 베리다. 핀란드 사람들은 블랙커런트, 레드커런트를 비롯해 블루베리, 링엄베리 등 매우 다양한 베리를 즐긴다. 숲에 둘러싸인 사한라티 리조트에는 길 양쪽으로 곳곳에 베리 류가 널려 있다. 눈에 띄면 그냥 따먹어도 될 만큼 깨끗하고, 그만큼 많다.
핀란드의 방아 이파리?
길게 늘어선 사이마 호수를 따라 사본린나 (Savonlinna)를 거쳐 다시 헬싱키로 돌아왔다. 역시 수도답다. 외곽의 지역 도시를 따라 북유럽의 자연을 만끽한 후 다시 보는 헬싱키는 곳곳에서 세련미 넘치는 풍광을 드러낸다. 딱히 차를 타지 않아도 좋았다. 잘 정비한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아깝지 않은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걷고 또 걸으며 헬싱키의 시간을 만끽하다 저녁 식사 초대를 위해 레스토랑 한 곳을 방문했다. 미쉐린 원스타를 획득하고 2017년 핀란드 최고의 레스토랑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론 (Grön)이라는 곳이다. 유럽의 여느 가게가 그렇듯 길을 걸으며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지나치기 딱 좋은 외관이다. 내부마저 소박한 편으로 테이블은 채 10개가 되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다. 가게 저 안쪽은 주방이다. 5~6명의 요리사가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몰두하고 있다. 주방의 가장 앞쪽에선 헤드셰프가 서브 나가기 직전의 요리를 매만진다. 마치 따사로운 바람이라도 불면 이내 사라질 섬세한 작품을 마무리하듯 손끝으로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곳의 특징은 자연 그대로의 재료만 사용한다는 것. 제철 재료를 중심으로 채소, 육류, 어류, 야생의 재료를 골고루 사용해서 메뉴를 짠다. 이는 최근 몇 년 새 북유럽에서 시작한 자연주의 요리의 한 갈래이기도 하다. 한때 세계를 휩쓸었던 분자요리의 대척점에 서 있는 요리 방식이다. 더 정확히는 물성을 바꿔 경외심과 신비함으로 식탁을 바라보게 했던 분자요리에서 자연에서 가져온 재료로 편안한 한 끼를 누리게끔 하는 방향으로 유럽의 주방이 선회했다는 의미다. 차례로 가져오는 메뉴도 겉보기에 화려하기보다 소박함이 깃든 플레이팅이다. 무엇보다 순간 놀라움을 주었던 건, 전채에 들어간 재료였다. 그 접시에는 방아 이파리가 들어 있었다.
방아의 원래 이름은 배초향이다. 한국 토종 허브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핀란드에서 배초향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걸까. 그곳의 셰프가 한국에서 배초향을 구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는 아니라고 했다. 함께했던 한국인 가이드에 따르면 현지에 정착한 한국인이 배초향을 재배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확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샐러드는 재료의 풍미를 살리는 쪽으로 밸런스가 잡혀 있었다. 각각의 재료가 가진 맛과 향이 뒤섞이며 씁쓸함 뒤로 달큼한 맛이 있었고, 마지막에 은은하게 배초향의 향이 피어올랐다. 메인 디시 역시 파격적이었는데, 수비드한 계란프라이가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나왔다. 스테이크나 생선 요리를 기대했던 사람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수비드 한 계란도 충분히 메인에 설 수 있다는 걸 알려준 한 끼였다. 우리에게 그토록 익숙한 단어 ‘휘바 (Hyvää, 참 잘했어요 혹은 매우 좋다는 뜻)’가 절로 나오는 멋진 식사로 핀란드의 마지막 식사는 기억에 남았다.
배초향은 한의학에서 곽향이라고 하며 방아·방애잎·중개풀이라고 부른다. 줄기는 뭉쳐나는데 네모지고 곧게 서며 위쪽에서 가지가 갈라진다. 길이 5~10cm, 나비 3~7cm의 달걀꼴 또는 달걀 모양의 심장형으로서 밑은 둥글거나 심장 밑처럼 생겼으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고 끝이 뾰족하다. 앞면에 털이 없고 뒷면은 약간의 털과 더불어 흰빛이 도는 것도 있다. 길이 1~4cm의 긴 잎자루가 있다. 보통 어린순을 나물로 먹거나 향미료로 이용한다. 약으로 쓸 때는 탕으로 하거나 환제 또는 산제로 하여 사용하며, 술을 담가서도 쓴다. 주로 소화기 질환을 다스릴 때 좋은데 감기, 토사곽란, 담, 두통, 소화불량, 위염, 장염, 중풍 등의 병증에 효과가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