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열제를 쓰지 않고 기다려보다
아이가 열 감기에 걸려 열이 펄펄 끓고 있다면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괴롭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대부분의 엄마는 애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약국이나 병원으로 달려가 해열제를 받아와 먹이게 된다. 그런데 만약 해열제를 먹이지 않고 아이가 그냥 앓도록 기다려준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1994년 일본의 오사카 시립대학 의학부에서는 이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실제 감기 환자 293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였다. 먼저 감기 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A 그룹의 환자들에게는 열이 펄펄 끓는 것에 대해 해열제를 투여하였다. B 그룹의 환자들에게는 열이 펄펄 끓더라도 일체 해열제를 투여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그리고 두 그룹이 정상 체온으로 떨어지기까지의 기간을 측정하였다. 그러자 해열제를 투여한 A 그룹의 환자들은 3.47일, 해열제를 투여하지 않은 B 그룹의 환자들은 1.99일이 걸렸다. 오히려 해열제를 투여하지 않은 환자들이 더 빨리 열이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이 실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엄마가 괴롭고 안타까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당장 열을 떨어뜨리고자 해열제를 쓴다면 오히려 아이를 더 오래 고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생제를 쓰지 않고 기다려보다
항생제의 경우는 어떠할까? 우리 주변에는 중이염에 걸린 아이에게 몇 달씩 항생제를 먹여 봐도 낫지 않아 고민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 소아과학회에 의하면 중이염에 항생제를 써야 하는 경우는 급성 화농성 중이염이 확실할 때이며 그것도 초기에만 쓰라고 한다. 장액성 중이염이거나 만성 중이염이라면 항생제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급성 화농성 중이염의 초기에 항생제를 쓰는 것에 대해서도 과연 쓸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실험이 있었다.
2011년 미국에서 급성 화농성 중이염을 앓고 있는 만 2세 이하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실험한 결과가 논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그룹은 발열과 귀의 통증이 시작되자마자 항생제를 투여하였다. 또 한 그룹은 어떠한 약리 작용도 내지 않는 가짜 약을 투여하였다. 그 결과 통증이 가라앉고 열이 내리는 시기가 두 그룹이 거의 똑같았다. 5일 정도가 되었을 때는 두 그룹 모두 통증과 발열이 거의 가라앉은 상태였다.
두 그룹의 결과가 비슷하다면 항생제를 쓰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냐고 할 수 있겠다. 항생제를 쓰건 쓰지 않건 통증과 발열이 사라지는 시점은 같겠지만, 대신 다른 것이 있다. 항생제를 쓰지 않고 중이염을 이겨내면 아이는 스스로 세균과 싸워서 이겨 완전한 면역력을 얻을 수 있다. 항생제의 힘에 기대게 되면 아이가 스스로 싸운 것이 아니기에 면역력은 불완전해진다. 항생제를 쓰지 않더라도 급성 중이염의 통증은 24시간 이내에 60%가 호전되고 3일 이내에 80%가 호전되며 1~2주 이내에 80%가 완치된다고 논문은 전한다.
소염제를 쓰지 않고 기다려보다
한 아토피 어린이 환자가 가족 여행을 다녀온 후 갑자기 아토피가 악화되어버렸다. 평소 관리를 잘 해오던 중이었는데 바닷가에 가서 신나게 놀고 왔더니 그만 상태가 나빠져 버린 것이다. 눈가에 붉은 기가 뚜렷이 보이면서 붓기도 생겼다. 평소 아토피가 있던 환부에서는 노랗게 고름도 몇 군데 잡혔다. 감염증이 살짝 보이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몸에서는 발열도 생겼다.
보통의 엄마라면 당장 병원에서 소염제를 받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의 엄마는 똑같이 아토피가 있었던 큰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 두었었다.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 소염제를 당장 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익혀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환부를 잘 씻겨주고 집에서 쉬게 하면서 상태를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는 며칠을 앓으면서 고생을 하더니 다행히 열이 가라앉으면서 잘 낫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아토피가 있던 환부에 노랗게 잡혔던 고름이 싹 사라지고 나자 그 이전보다 아토피가 좋아져 버린 것이다. 긁었던 상처 부위에서는 새살이 생겨 있었고 가려움증도 전보다 훨씬 덜해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피부를 오랫동안 긁다 보면 마치 코끼리 가죽처럼 두꺼워지는 태선화 현상이 생기는데 이것도 좋아졌다는 것이다. 단지 며칠 동안 고름과 발열로 끙끙 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토피가 전보다 더 좋아졌다. 아이가 앓는 동안 엄마의 마음은 불안과 걱정에 휩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누르고 아이가 이겨내기를 믿고 기다려주자 아이는 면역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마음이 편하고 아이는 몸이 불편하다
아이가 몸이 아프면 엄마의 마음은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과도 같아진다. 아이가 열이 날 때마다, 아이가 기침을 할 때마다, 아이가 피부를 긁을 때마다, 아이가 콧물을 훌쩍거릴 때마다, 아이가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를 때마다 마치 엄마가 잘못해서 그런 것 인양 죄책감은 바늘이 되어 엄마의 심장을 콕콕 찔러 버린다. 그래서 아이를 들쳐 업고서 근처 병원으로 달려간다. 한 시간씩 기다렸다가 약을 받아와서 아이에게 먹여야 엄마의 도리를 다한 것 같다.
잠깐의 해열 효과, 잠깐의 진통 효과, 잠깐의 소염 효과는 엄마의 마음을 잠깐은 편하게 해준다. 하지만 아이들의 몸을 약에 의존하게 만들어서 병과 직접 싸우는 기회를 박탈시켜 버리면 온전한 면역력은 생기지 않는다. 비록 당장은 아이가 열로 끙끙 앓더라도, 비록 잠깐은 아이가 아파서 구르더라도, 잠깐은 아이가 가려워 피부를 긁더라도 며칠만 더 기다려주면 병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 아이가 힘들게 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엄마의 마음은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며칠만 더 기다려주면 된다.
변증(變蒸)이란 면역력 획득 프로젝트
우리 아이들은 자라는 과정에서 온전한 면역력을 획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면역력이란 것은 공짜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중간 과정의 수많은 고비들을 이겨야 한다. 그 고비는 주로 발열이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의 변화를 변할 변(變)자와 훈증할 증(蒸)자를 써서 ‘변증(變蒸)’이라고 부른다. 한번 훈증 되고 나면 더 튼튼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보통 아이들이 한번 앓고 나면 쑥 자란다고들 말한다. 이는 변증을 한번 앓은 것이다. 변증을 한번 앓고 나면 면역력이 하나 더 장착되어 더욱 강해진다. 동의보감에서는 이 변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소아의 변증을 사람들은 이빨이 생기고 뼈가 자라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비유하자면 마치 누에가 잠을 자고 용이 허물을 벗고 호랑이가 발톱을 새로 가는 것과도 같은 것으로, 아이들은 이렇게 변하면서 자라게 된다.”
누에가 잠을 자고 나면 나방이 되듯이, 용이 묵은 허물을 벗고서 더욱 몸집이 커지듯이, 호랑이가 낡은 발톱이 빠지면서 더 강한 발톱으로 새로 갈듯이, 우리 아이들도 이빨이 생기고 뼈가 자라면서 변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앓고 아프고 열이 난다. 그러면서 더 자라고 더 강해진다. 이것을 바로 변증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괴롭고 애타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아이를 기다리고 응원해 주자. 괴롭고 애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불필요한 해열제, 항생제, 소염제를 과잉으로 먹이면서 아이의 변증을 억지로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 아이는 귀하디귀한 면역력을 얻고자 애쓰고 있는데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플 땐 그냥 앓게 두어라. 변증이 다 끝나면 건강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 한의사 방성혜의 엄마가 읽는 동의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