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할머니하고 목욕탕에 가면 왠지 싫었다. 소풍날도 어린 동생들이 달라붙은 엄마 대신 할머니가 따라나서시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영문도 모르고 손녀딸한테 왕따에 배신을 당하신 할머니한테는 정말 죄송했다. 우리 곁에는 자손들에게 뼈와 살을 다 발라 먹이고 쭈그렁 주름만 남으신 할머니들이 계신다.


일본의 ‘망언 전문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 도지사가 이런 망언을 했었다.
“할머니는 문명이 가져온 것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 여성이 생식 능력을 잃고도 산다는 건 의미 없는 일이고 지구에 심각한 폐해를 초래한다”라고 해서 일본 여성들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생식능력을 잃었다는 말은 월경을 안 해서 아이를 더 이상 낳을 수 없다는 뜻이니 소위 폐경(閉經)이 되었다는 뜻이다. 폐(閉)자를 쓰니까 나이 든 여성의 몸이 폐기물, 폐차장, 폐광처럼 못 쓰게 버려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폐경의 진정한 의미는 평생 동안 수백 번 생리로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제는 더 이상 피 흘릴 필요가 없다는 완경(完經)을 의미한다.


몇 년 전 출근길 버스에서 라디오를 듣다 웃음을 터뜨렸다. 외국 어느 동굴에서 오래된 인류의 식탁이 발견되었는데 연구 결과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남자들끼리만 먹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가 농경 시대 전에는 사냥을 해서 고기만 먹고 산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냥은 부족 전체가 합심해서 하는, 어쩌다 성공하는 이벤트였다고 한다. 실제로 먹이의 대부분은 나무 열매, 버섯, 뿌리 등 식물성이었다고 한다. 열악한 식량 부족 환경에서 인류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여기에 여성의 완경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나는 어미와 같이 너희들을 키운 할미다. 어미가 너희를 낳을 때 할미가 돕지 않으면 정말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지. 침팬지 새끼는 얼굴이 앞으로 나와 어미가 혼자서 끄집어낼 수나 있지. 너희들은 엄청 큰 머리와 어깨가 걸리는 데다 얼굴은 반대로 땅을 보고 나온단다. 어미 혼자서 잡아당길 수도 없으니 힘든 출산인게지. 며칠이면 서고 뛰는 동물 새끼들과 달리 너희들은 머리도 못 가누고 연약해서 열 살은 키워야 제 손으로 먹이를 찾아 나설 수 있거든. 네 어미는 어린 동생 젖먹이가 줄줄이 딸려서 꼼짝을 못했단다. 


그때 내가 너희들을 키우고, 먹이도 구하고,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살아왔단다. 어느 숲에 가면 열매가 익었는지, 땅속 뿌리를 캘 수 있는지, 독초를 피하고 가죽 손질은 어찌하는지 내 머릿속에 다 들어있단다. 조상들 살아온 내력이며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이 할머니는 다 꿰고 있단다. 네가 배 아프다고 울 때 할미가 먹인 풀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찾아 먹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이구 내 새끼 이제 그만 코 자거라.”


완경의 지혜


오랑우탄과 침팬지 같은 영장류는 죽는 날까지 완경 없이 월경을 하지만 약해진 몸으로 새끼를 낳기 때문에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 반면에 할머니들은 완경 후 30여 년을 더 살면서 노동을 제공하고 자손의 아이를 양육하신다. 그 수고와 사랑 덕분에 인류의 생존과 번식, 지능발달과 문명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이다. 알고 보면 완경은 인류의 지혜이며 할머니는 인류의 보배이시다.


전국 할머니 조합에서 사발통문 돌린다. 자~~ 충무김밥 할매, 강릉 순두부 할머니, 마산 아구 할매, 원조 뼈다구 해장국 할매들 그리고 집으로 할머니들. 사는 날까지 골 빠지게 일하고 애 키워주고 돈까지 벌어대도 누가 고맙단 소리 하던가. 어이 거기 노랑머리 산타 할머니도 이리 와봐. 일 년 열두 달 장 보고 손톱 빠지게 포장해 놓고선 신나게 썰매 타고 선물 돌리면서 생색내는 건 왜 산타 영감만 하는겨? 누가 우리 한 일을 알아주나 한탄만 하냐구. 세상이 할머니를 홍어 뭐처럼 우습게 보는데 정신차리게 해야지 않겠어? 욕쟁이 할매가 속 시원하게 한번 날려봐. 우리 뱃속에서 몽땅 나온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 이유명호 원장의 애무하면 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