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마산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이제는 사라진 이름 마산을 향해 혼자 훌쩍 길을 나섰다.
거친 남자의 사랑이 느껴지는 도시
과거의 마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은 부산에 견주어 결코 작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한때는 전국 7대 도시 중 하나로 거론될 만큼 규모 있고 화려한 도시의 기억이 그 이름에 서려 있다. 마산이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MBC의 모 PD는 이렇게 말했다. “거친 남자의 사랑이 느껴지는 도시”라고. 그만큼 거친 남자, 상남자의 느낌이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산은 예부터 전국 팔도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융성한 항구도시였으니까. 뱃사람 특유의 거친 표현과 반대로 그 속에서 느껴지는 속 깊은 정이 마산 사람을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마산은 진해만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외해에서부터 무려 9킬로미터나 깊숙하게 들어앉아 있어 바다치고는 수면이 무척 잔잔하고 수심도 깊은 편이다. 그 앞은 돝섬이라고 부르는 저도(猪島)와 모도(毛島)가 막아섰다. 천연의 방파제다. 덕분에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마산만은 꽤 안전했다. 일찍부터 군사요새지로 이용된 건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이었다. 1280년에는 몽골군이 일본 원정을 위해 이 지역을 기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마산으로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한 건 낙동강 하류 일대에 있는 열세 개 군의 조공미를 이쪽으로 모아 한양으로 조운하면서부터다. 격납고 역할을 하는 조창이 설치됐고, 물자를 따라 공관이 생기고 민가가 번성했다. 얼마나 사람이 많았으면 전염병이 만연해서 도시의 이름을 바꿨을까. 원래 이 지역은 오산(午山)이라 불렀다. 뜻은 같지만 음이 다른 말 마(馬) 자로 개칭해 마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마산은 민주화의 성지 같은 도시이기도 했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도시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시위는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일어난 것이 4·19혁명이었다. 마산은 그만큼 깨어있는 도시였고, 마산 시민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당시 민주화 시위가 벌어진 장소가 마산의 중심이었던 창동이었다. 마산이 한국 민주화의 초석을 놓은 도시라면, 창동은 민주 성지 마산의 중심이다. 시위 당시 수많은 시민이 쏟아져 나와 집결할 만큼 마산에 있어서는 상징적이었다. 마산에서 태동한 기업이 번성하고 경제가 부흥할수록 창동은 시끌벅적한 번화가로 바뀌었다. 젊은 열정과 문화가 살아 숨 쉬며 불야성을 이뤘다. 몇 번을 고민하다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언제부터인가 마산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창동은 화려했던 옛 마산을 보여주기에 가없이 좋은 곳이라는 판단이 섰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고도(古都)
지금의 창동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창동 거리에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를 지나면서부터다. 마산의 기업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거나 IMF 구제금융 사태를 직격으로 맞은 기업이 무너지면서 사람도 마산을 빠져나갔다. 아마 창동이 그렇게 텅 빈 거리가 될 거라고는 마산 사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고 2012년, 창원시는 옛 마산의 중심가를 부활시키기로 했다. 창동은 중심가이자 번화가였지만, 그만큼 많은 문화·예술인이 모이는 곳이기도 했다. 마산의 문화는 창동에서부터 피어나 전국으로 세계로 뻗어 나갔다. 창동을 배경으로 시를 썼던 이선관 시인도 있었고, <꽃>으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도 마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마산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며 문화·예술인 모임인 ‘외교 구락부’에서 활동했다. 한국 현대무용을 이끈 선구자인 김해랑도 마산이 배출한 인물이었다. 시인이자 연극인이었던 정진업, 평양 출신인 서양화가 최영림도 창동을 무대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였다.
창원시가 복원하고자 했던 창동의 옛 모습은 문화·예술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문인이 모여 술잔을 들고 각자의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던 골목을 다시 단장하고 이 시대의 문화·예술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50~6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골목은 부활을 바라는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 화려한 벽화와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치장했다. 구 시민극장과 학문당 서점 주변의 길을 따라 그렇게 창동은 되살아났다. 누구나 도자 체험을 할 수 있는 공방과 추억의 음악을 만나는 공연장이 들어섰고, 마산 출신 예술인의 작품을 만나고 그 시대의 미감을 곱씹는 공간이 마련됐다.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창동의 뒷골목으로 주말이면 수많은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며 흘러들었다. 도시재생사업 초기만큼은 아니지만, 골목골목을 찾아 여행하는 인파는 제법 꾸준하다. 추억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세다.
속을 어루만지는 까치복국의 매력
마산은 먹을거리가 참 많다. 요리 이름 앞에 ‘마산’이라는 글자가 꼭 따라붙는 아귀찜부터 통술 등등.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건 복국이다. 마산은 영남 지역에서도 복국 맛있기로 유명했다. 마산 복국의 신화를 만들어 낸 건 마산어시장 옆 복국 거리의 남성식당이다. 30여 곳의 복국집이 밀집한 이곳에서도 가장 처음 문을 연 집이다. 3대를 이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80년 가까이 영업 중이다. 이 집의 2대 사장이었던 박복련 씨가 특수식품 자격증을 취득한 게 1962년이니 이곳의 복국 역사는 한국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준이다. 창업자인 박복련 씨의 어머니는 그 옛날 일본으로 건너가 복 손질하는 법을 직접 배워왔다고 했다.
언젠가는 잘못 손질한 복을 먹고 사람이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검찰이 박복련 씨에게 자문을 구한다며 검찰청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런데 박복련 씨는 “물어볼 게 있으면 직접 와서 물어보라”라고 호통을 쳤다고. 결국 검사들은 이 식당까지 찾아왔고, 나중에는 재판을 배당받은 판사도 자문을 구하러 직접 이곳을 다녀갔다. 이 집은 복국 거리에서도 전설 같은 곳이다.
한창때는 1년 내내 사람이 바글바글했지만, 마산의 경기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은 한적한 편이다. 예전에는 마산에 산업 시찰을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러 이 집을 찾기도 했고, 김영삼 대통령도 이 집의 복국으로 끼니를 때웠다. 마산에 내려오면 대통령도 으레 남성식당을 찾을 만큼 명성이 대단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은 복국의 뒤를 이를 후대가 없다. 노부부가 평생을 그랬던 것처럼 문을 열고 복을 다듬는다. 오후의 해그림자가 길어질 무렵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집의 사장인 김승길 씨가 쫄복국을 권했다. 하지만 이 골목은 까치복의 유명세도 만만치 않다. 궁금한 차에 까치복국을 먹기로 했다. 주방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10여 분쯤. 마침내 까치복국이 나왔다. 노란 빛깔이 도는 맑은 국물 속에 노란 지느러미가 특징인 까치복이 먹음직스럽게 담겼다.
식초를 살짝 두르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식초의 신맛은 국물의 풍미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향긋한 미나리와 까치복의 살코기를 한 번에 씹었다. 쫄깃한 듯 슬쩍 부스러지는 복의 살점이 매력적이다. 약간은 까슬한 촉감을 가진 까치복의 껍질도 처음에는 다소 이질적이었지만 금세 적응이 됐다. 화학조미료를 더한 감칠맛이 없어 투박한 반찬도 썩 좋다. 경상도 음식은 맛이 없는 게 아니라 그곳 특유의 맛이 있는 법이다. 모든 음식에 감칠맛이 더해진다고 더 좋은 건 아니다. 이 집의 복국은 마산다워서 좋았다. 아쉬운 건 저 노부부가 가게 문을 닫으면, 다시는 이 맛을 볼 수 없을 거라는 현실이었다. 우리에게 이 집의 복국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5년? 10년? 앞자리에 앉아 신문을 보는 주인장의 어깨가 작아 보인다. 마치 내 아버지의 그것처럼.
복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혈액순환에 좋으며 근육을 부드럽게 하는 장점이 있다. 단백질과 비타민 B1, B2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유지방이 전혀 없어 성인병 예방에 좋다. 특히 비만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식품이다. 당뇨병이나 간 질환을 앓는 사람에게도 식이요법에 좋은 식재료가 된다. 지방이 적고 양질의 단백질이 많아 술 마신 후 해장에도 인기가 좋다. 동맥경화 예방과 뇌 기능 향상에도 효과가 좋아서 노년층이 즐겨 찾는다. 수술 전후의 환자 회복 및 갱년기, 노화 방지, 신경통, 두통, 해열, 일사병, 파상풍에도 좋은 최고의 음식이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