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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타이완(臺灣)의 아리산(阿里山)으로 향하는 걷기 여행입니다. 익숙하게 걸었던 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이 들어 당황하게 되면, 저는 이렇게 길을 떠납니다. 길을 걷다 보면 당황했던 마음이 다시 자신의 마음과 리듬을 찾게 됩니다. 길이 ‘道’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걷다 보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혹여 깨달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여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걷기는 일단 건강이라는 것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이완의 아리산은 15년 전쯤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다녀왔던 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매력은 새벽에 산악열차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 맞은편 산의 일출을 볼 수 있고, 걷기 좋은 트레킹 코스가 있으며, 겨울의 추운 날씨를 피해 실컷 걸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학회를 마치고 바삐 다녀왔었기에 이번에는 조금 느긋하게 걸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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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으로 가는 길은 타이베이(台北)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조그마한 문화의 도시 지아이(嘉儀)를 통하여 가게 됩니다. 지아이 고속철역과 지아이역 사이에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합니다. 셔틀버스에 오르면 기사가 주는 티켓을 받아 타고 내릴 때 찍고 반납하면 됩니다. 지아이역에서는 아리산으로 향하는 산악열차가 있습니다. 단, 현재는 펀치후(奮起湖)까지만 운행이 됩니다. 몇 년 전의 지진으로 펀치후에서 아리산으로 가는 길이 끊겨서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더구나 기차는 하루에 1번만 운행을 하고 2시간 20분 남짓 소요됩니다. 펀치후에서 아리산까지의 버스도 하루에 불과 3대이기 때문에 이용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아리산까지 2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직행버스를 이용하게 됩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아리산으로 올라갈 때는 직행버스, 내려올 때는 아리산에서 펀치후까지 버스, 또 펀치후에서 지아이까지는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아리산의 여러 면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펀치후가 단지 지나가는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작정하고 그곳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매력적인 도시락이 있다는 정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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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한 번쯤은 타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원래는 지아이 바닷가 근처의 마을에서 아리산까지 2,200m를 올라가는 산악열차입니다. 지금은 1,200m의 펀치후까지만 다니기는 하지만... 이 열차는 협궤열차로 한 열에 3명이 앉게 됩니다. 일반열차 특실처럼 1좌석과 2좌석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기차는 단선으로 나뭇가지가 창문을 타닥타닥 두드릴 정도의 좁은 길을 구렁이 기어가듯 왼편, 오른편으로 돌아가며 스멀스멀 갑니다. 깊은 산중을 지나가다 문뜩 절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산모퉁이를 돌면서 살짝 저 밑의 첩첩산중을 드러내 보여 줍니다. 기차의 매력은 자연이 그대로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밀림을 지나는 기차를 타다 보면 때로는 낭떠러지를 보고, 다리를 건너고, 터널을 지나면서 자연과 불과 10cm 정도 떨어져 있는 가깝디가까운 터치감이 느껴집니다. 그대로 자연과 접촉하고 있는 그런 느낌... 2시간여를 가는 동안 잠시 졸기도 하고, 또 살짝 눈을 뜨면서 감탄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온전히 나의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기차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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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이 아닌 펀치후에서도 타이완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펀치후는 아리산으로 가는 중간에 들리는 지점으로 기차가 여기까지 운행합니다. 이곳은 해발 1,200m로 지아이와 아리산의 딱 중간에 위치합니다. 그렇지만 고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관계로 차를 많이 재배하며 아마 커피 재배도 가능한가 봅니다. 그 유명한 아리산 우롱차와 커피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아이에서는 버스로 1시간 20분, 기차로 2시간 20분 만에 도달합니다. 지명이 호수라고는 되어 있지만 정작 호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멋진 트레킹 코스와 그보다 더 근사한 맛집과 찻집이 있습니다. 특히 도시락집이 유명합니다. 아리산으로 트레킹을 갈 때 이곳에서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도 강추할 만합니다. 트레킹 코스는 기차역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1시간 반 정도의 짧은 코스가 있지만, 기차역에서 도시락을 준비하면 자연을 충분히 만끽하면서 몇 시간이라도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숲속 깊이 들어가서 자연과 함께 하는 도시락 파티를 열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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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리산입니다. 2,200m의 아리산 여행자 센터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습니다. 능력에 따라서는 하루면 충분한 걷기 코스들입니다. 한 코스 당 2~3시간 남짓의 거리이기 때문에 작정하고 걷는다면 하루면 충분한 거리죠.


•쥬산(祝山)역 코스 - 일출을 보기 위해 산악열차를 타고 쥬산역에 내려 전망대에서 일출을 본 후 여행자 센터로 돌아오는 1시간 남짓의 트레킹 코스

•션무(神木)역 코스 - 박물관, 신목, 고목 군상 등 볼거리가 풍성한 트레킹 코스로 특히 아리산 지역의 여러 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션무역이 있는 코스

•자오핑(沼平)역 코스 - 공원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아리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는 코스


그리고 걷는 트레킹에서 조금 시간을 내면 소립원산(小笠原山, 2,488m), 타산(塔山, 2,663m) 등으로 향할 수도 있습니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면 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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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산 지역의 길들은 잘 가꿔 놓았습니다. 좀 과하게 잘 가꿔 놓았습니다. 눈, 코, 귀, 손의 느낌은 자연 속에 푹 빠져 있는데, 다리는 인공적인 트레일을 걷는 느낌입니다. 2,000년이 넘는 고목의 옆을 지나는데도 인공 나무로 만든 블록을 계속 걸어 다녀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고목들은 900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의 수령을 가진 나무들이 각각 번호가 붙어 있는 상태로 우리를 마주합니다. 누군가 나무는 참 오래 산다고 하더니만, 이곳의 나무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2,000년 전 이 숲에는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고작 몇 그루... 나머지 나무들은 아마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여러 나무 가운데 유독 살아남은 나무들만이 우리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수령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는 나무들은 몇만 분의 일을 뚫고 유독 오래 산 나무들입니다. 나무 옆을 지나면서 거듭 존경을 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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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일출에 대한 기대와 생각을 달리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일출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한 여행객은 나에게 '실망'이라는 말을 건넵니다. 자고로 일출은 붉은 태양이 시뻘건 해를 마치 소 혀처럼 드러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을 합니다. 아마도 바다에서 떠 오른 일출의 감동을 여기서 느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산의 일출은 바다의 일출과 다릅니다. 더구나 높은 산꼭대기에 바라보는 일출, 특히 높은 산봉우리를 뚫고 나타나는 태양은 이미 자랄 만큼 자란 커다란 영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강력한 빛을 받는 것입니다. 아리산 일출은 여느 햇빛보다 강렬했습니다. 쥬산은 3,000m가 넘는 곳에 위치합니다. 우리는 2,200m의 아리산에서 바라보는 일출. 그야말로 최고의 영웅을 맞이하는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신의 강림을 맛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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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후의 트레킹은 어떤가요? 해가 뜨기 전, 해가 진 이후에 숲길로 접어들게 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안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주 자그마한 소리에 놀라고, 불빛에 반가워하고, 모든 상황에서 나의 오감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이 사람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 같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걸어서 나아가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이 잠잠해지는 것이 확인되고, 그 불안을 관찰하며 때로는 아직도 나의 오감이 꼿꼿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면서 한 걸음 더 내딛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약간의 안도감도 생깁니다. 불안을 안고 걸어온 길이 과거가 되고 또 경험이 되어 앞길에 대한 불안이 조금은 줄어듭니다. 더구나 백색의 공포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나의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한참을 걷고서 다시 익숙하고 안전한 장소에 도달합니다. 안도감이 온몸에 스며듭니다. 바짝 긴장했던 오감이 이제는 느슨해집니다. 그 느슨해짐과 함께 안도감, 평화로움을 강하게 느껴봅니다. 인간인지라 외부 자극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몸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커다란 긴장 이후의 안정감은 그 크기가 더욱 큽니다. 평화로움도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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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라도 안개가 밀려오면 산은 말할 것도 없이 어느덧 10여 미터의 앞도 채 보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날씨에 따라 아리산의 느낌은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몽환적으로 마치 꿈속처럼 안갯속을 헤매다가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 능선을 따라 빛나고 반짝이는 보석 같은 산세와 숲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곳을 걸었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느꼈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결국 나의 눈으로, 귀로, 코로, 입으로, 손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걷다 보니 하루 3만 보를 채우게 됩니다. 걸은 만큼 본래의 나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자연이 내게 준 선물입니다. 그리고 뻐근한 허벅지와 함께 몸이 건강해지는 것도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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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우 교수의 걷기. 여행.. 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