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는 잘 알려진 듯하지만,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매력이 많은 나라 중 하나다. 오래전부터 무척 궁금하던 차에 그곳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게 됐다.
동남아시아 안쪽에 숨은 보석
라오스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09년을 전후해서 서서히 이름이 나오더니 3~4년 전부터 저가항공 (LCC) 붐을 타고 한국인 사이에서 대세 여행지로 등극했다. 라오스는 위로 중국, 동쪽에 베트남, 아래로 태국, 서쪽으로 캄보디아와 미얀마를 이웃하고 있는 나라다. 인접 국가들에 비해 한참이나 늦게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짐작건대 바다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나라는 위에 열거한 국가들에 둘러싸인 동남아시아 유일의 내륙국가다. 동남아시아라면 응당 그렇다는 듯 특유의 아름다운 해변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편견이 라오스의 매력을 상당 부분 가리지 않았을까.
라오스의 진가를 처음 발견하고 세상에 드러낸 사람들은 역시나 유럽의 여행자였다. 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글 속에 숨겨진 파라다이스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 소문을 따라 찾아간 곳에 라오스가 있다는 이야기. 그렇게 소문이 사람을 모으고 여행지를 만들었다. 그 이전의 라오스는 그저 순박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사는 내륙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수도인 비엔티안 (Vientiane)에서 차를 타고 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여행을 시작한다. 라오스는 북으로 올라갈수록 험준한 산악지형에 가까워진다. 중국의 서남부에서 볼 수 있는 카르스트 지형은 베트남을 거쳐 이곳까지 흘러내려 온다. 오랜 세월 석회암 지대를 휘돌아 감은 물길은 봉긋하지만 아찔한 형상을 빚어냈다. 그 절정을 만나는 곳이 방비엥 (Vang Vieng)이다.
방비엥은 젊다. 태국의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떠돌던 내륙의 블루 라군은 탐험심 가득한 젊은 유럽 여행자를 유혹했고, 오토바이며 렌트한 자동차를 끌고 방비엥을 찾은 그들은 이곳에서 에메랄드빛 계곡물에 환호했다고 전한다. 남쏭강의 잔잔한 물길과 그 뒤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카르스트 산은 또 어떤가. 배낭여행자의 천국과도 같았던 이곳은 한때 온갖 환각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천국이기도 했다. 그러다 사망사고가 발생하면서 지금은 약물 사용이 엄격히 금지됐다.
방비엥이 젊은이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여행지라면, 라오스의 고도(古都) 루앙프라방 (Luang Prabang)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매만져온 라오스의 속내를 엿보는 도시다. 루앙프라방은 시간의 흐름이 남달랐다. 다른 어디보다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이 들었다. 루앙프라방은 란쌍 왕국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다. 란쌍이라는 이름은 라오스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금의 라오스는 란쌍 왕국을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는다. 이 왕국이 14세기부터 터전으로 삼았던 이 땅은 그야말로 천혜의 조건을 가졌다. 험난한 산악 지형에 둘러싸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외적의 침입에서 안전했고 고지대에 가까워 기후도 온화한 편이다. 메콩강을 끼고 있어 먹거리도 풍부했다. 18세기 후반, 독립국으로서 란쌍 왕국은 막을 내렸지만 그들이 이곳에 건설한 도시 기반은 지금까지 건재하게 이어진다. 도시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유례없는 결정이 가능했던 건, 그만큼 루앙프라방에 옛 도시의 문화가 잘 보존됐다는 뜻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고도(古都)
푸른 새벽을 가르고 고도의 도심으로 길을 나섰다. 루앙프라방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탁밧이다. 탁밧은 스님들이 음식을 구하러 다니는 행위인 탁발을 일컫는 라오스어다. 석가모니 부처 당시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그랬던 것처럼 매일 새벽 하루를 버틸 음식을 구하기 위해 탁발을 나선다. 계율에 엄격한 남방불교에서는 이른 새벽 탁발로 얻은 음식으로 1일 1식을 하며 위빠사나 수행에 정진하는 게 일반적인 풍토로 자리 잡고 있다. 척박한 산사의 환경에서 산채를 뜯고 손수 농사를 지어 하루를 사는 한국의 사찰 문화와는 조금 다른 형편이다.
아침 6시부터 루앙프라방의 중심가인 왓 쏩부터 시싸왕웡까지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앉았다. 이곳으로 80여 개 사원에서 나온 스님이 줄지어 탁밧을 나선다. 수십, 수백에 이르는 수행자가 묵언을 한 채 음식물을 담아 가는 광경은 자못 경건하다. 음식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한결같은 표정과 분위기다. 서양인의 눈에 신비롭게만 보였던 이 모습은 점차 관광상품처럼 변질되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아직 경건함은 살아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탁발을 받은 스님이 행렬의 마지막 길 끝에 놓아둔 큰 그릇에 음식을 덜어내는 행위다. 모르는 이에게는 이것이 마치 배부른 출가자가 음식을 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은 더 가난한 이를 위해 자기가 받은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다. 말 그대로 십시일반 모은 음식은 루앙프라방의 하층민이 하루를 살 수 있는 큰 힘이 된다.
루앙프라방에서는 여행을 하지 말고 일상을 놓아두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거리를 걷는 행위일지라도, 이곳에서는 그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관성적인 일상을 내려두고 이곳을 흐르는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 더 넓어지는 시야와 생각의 자유로움이 찾아온다. 그래서 루앙프라방을 이야기하며 그 많은 여행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곳’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패키지보다는 자유여행으로, 캐리어보다는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찾아왔을 때 루앙프라방의 속내는 더 살갑게 다가온다.
루앙프라방에 꼭 봐야 할 스폿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산악지형이 숨겨둔 아름다움을 십분 보여주는 쾅시폭포는 반드시 만나야 할 명소다. 방비엥의 블루 라군과 시크릿 라군이 카르스트 지형 사이에 은밀히 숨어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쾅시폭포는 그 에메랄드빛 매력을 웅장하게 드러내는 곳이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아무리 전해 들어도, 아무리 많은 사진을 보아도, 이곳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만큼의 감동을 전달할 수 없다. 굽이치며 쏟아지는 물결과 그 아래로 계단처럼 층층이 늘어선 푸른 웅덩이들. 웅덩이들은 천연 수영장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를 즐기고 활보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다. 그러나 쾅시폭포의 매력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폭포의 우측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15분쯤 올라가면 폭포의 상부에 올라설 수 있다. 폭포의 발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주는 동적인 쾌감에 한껏 젖었다면, 그 위에서는 무척 정적인 정글의 풍광을 맞이한다. 정글이 숨겨둔 은밀한 놀이터처럼, 우거진 나무 아래로 맑디맑은 물가가 흐르고 있다.
정성 가득한 왕의 식사
루앙프라방을 여행하면서 가장 큰 소득이라고 여겼던 것은 먹거리였다. 해외를 여행하면서 아주 간혹 느끼게 되는 즐거움 중 하나는 그 나라 왕조의 음식을 맛볼 때다. 이곳에서는 란쌍 왕조의 왕실 만찬인 칸톡 디너를 맛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미 칸톡 디너라는 단어를 들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태국 북부지방인 치앙라이에서 칸톡 디너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꽤 저렴한 가격에 한 상 차림의 식사와 전통춤을 구경할 수 있는 상품인데, 사실 이 음식은 라오스 루앙프라방의 것이다. 란쌍 왕조의 말기, 왕가가 분열하면서 일부가 태국 치앙라이에 자리를 잡았고 그 전통이 그쪽 지역에서도 이어져 오고 있을 뿐이다.
정작 루앙프라방에서는 제대로 된 칸톡 디너를 만날 수 없었는데, 줄리아나 리조트에서 이를 재현해냈다. 칸톡 디너는 여러 가지 요리를 ‘칸톡’이라 부르는 나무 트레이에 올려서 제공하는 만찬을 의미한다. 줄리아나 리조트 측에서는 샌달우드와 레몬그라스를 더한 커리, 돼지비계를 바싹 튀겨낸 튀김, 메콩강 생선 요리, 스프링롤과 담백한 맛의 스프, 두 가지 쌀로 지어낸 밥 등이 한상으로 제공된다. 물론 과거의 칸톡 디너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게 구성한다. 현지인의 설명을 듣고 판단컨대, 칸톡 디너는 라오스의 만한전석(滿漢全席)에 가까웠다. 그만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수십 가지의 요리법이 동원된 잔칫상이다. 물론 줄리아나 리조트에서는 이 중 일부만을 재현하고 한 상 차림으로 구성했다.
라오스의 많은 음식이 그러하듯, 칸톡 디너 역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향신료가 쓰였음에도 과하지 않고, 음식의 간도 적절하다. 무엇보다 독특한 건 돼지비계 튀김. 하얀 유과를 연상케 할 만큼 기름기를 쪽 빠진 상태인데, 약간은 질깃하면서도 고소하다. 씹는 맛이 좋아서 의외로 자꾸 손이 간다. 함께 나온 커리에 찍어 먹어도 좋고, 별도로 나오는 피시소스에 찍어 먹어도 좋다. 샌달우드가 들어간 커리는 캄보디아에서도 즐겨 만드는 방식의 그것이다. 향긋한 향이 더해져 자꾸 숟가락을 들게 만든다. 곁들이는 탕은 기름지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기름을 꽤 사용한 다른 요리와 밸런스가 잘 맞는다. 모두가 아주 만족스러워 할 만큼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앞으로 루앙프라방을 여행한다면, 칸톡 디너는 빼놓지 말아야 할 필수 과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돼지비계는 인간의 오랜 음식 문화에서 항상 고급 식자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부터 비계가 많은 고기가 들어갈 때 비로소 진수성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비계 자체가 지방 부위여서 몸에 해로운 포화지방이 많다는 오해를 받았지만, 실은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 함량이 절반 수준에 불과하며, 도리어 건강에 이로운 불포화 지방 함량이 살코기에 비해 두 배가 넘는다. 비타민 D도 많이 함유돼 있어 어린이의 성장발육과 노년층의 골다공증 예방에 좋다. 돼지비계를 이용해서 만든 기름인 라드는 주방에서 최고로 치는 식자재다. 서양에서도 라드를 이용해 파이나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고 버터 대용으로도 사용한다. 그만큼 맛이 아주 뛰어나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