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숲이 있었고 고요한 호수가 있었다. 그 곁에 자리를 잡고 캠핑을 했다. 주말을 이용해 일본 사가현 우레시노로 떠난 백패킹이었다.
고요한 호수 곁에서 보낸 하룻밤
사가현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많을 거다. 들어보기는 했으나 조금은 생소할 수 있는 지명일 테니. 사가현은 일본 규슈에 위치해 있다. 규슈의 관문이라 불리는 후쿠오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다. 그러니까,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시점부터 넉넉하게 세 시간이면 사가현에 닿는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사가현 우레시노라는 지역의 히로코우라 캠핑장이다. 자연환경을 워낙 잘 보존하는 일본인지라 숲속에서 보낼 하룻밤에 절로 기대감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좁은 길을 따라 차가 굽이굽이 올라갔다. 창밖으로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스쳐 지나는가 싶더니 그 터널을 통과하자 이번엔 태양광 발전 패널이 줄을 서 있다. 그 뒤로는 다시 울창한 숲이다. 몇 번이고 차가 원시림 터널을 들락거린 후, 이번에는 너른 차밭을 만났다. 사가현은 일본 최고의 녹차 산지다. 그림처럼 이어지는 차밭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 길의 끝자락 즈음에서 캠핑장 입구가 나왔다. 이곳은 해발 526m 지점.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이 하늘을 가린다. 이 산꼭대기에 멋진 호수가 있다. 호수를 마주하고 우리는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다.
캠핑장의 시설은 훌륭했다. 곳곳에 텐트를 칠 수 있도록 사이트를 만들어 놓았다. 캠핑이 불편한 사람은 방갈로를 이용하면 된다. 적게는 4~5명, 많게는 50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방갈로까지 인원과 목적에 맞춰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했다. 호수는 물이 무척 맑다. 멀지 않은 곳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 떼의 크기가 만만치 않다. 그만큼 사람과 자연 생태가 서로 어우러지는 곳이다. 이 캠핑장에서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가격이다. 텐트 한 동당 500엔. 한화로 환산하면 5000원꼴이다. 오토캠핑 사이트는 조금 더 비싸다. 3000엔. 우리 돈으로 3만 원 정도다. 방갈로는 4인용이 3000엔, 50인용이 18000엔 수준이다. 가격을 들은 일행 중 한 명이 외쳤다. “이게 말이 돼?” 그러게,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러나 가격표는 떡하니 그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당당하게 붙여놓고 있었다.
자연 속을 걷고 느끼는 즐거움
자연을 잘 보존했다는 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연 속 생명과도 이웃하기 좋다는 이야기다. 저쪽에서는 ‘벌을 조심하세요!’라는 경고 표지판이 보이더니 호숫가 이쪽에는 ‘뱀을 조심하세요!’라는 경고 표지판이 서 있다. 맑은 호수와 육지의 경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하얀 꽃잎이 투명한 물 위에 하얗게 수를 놓았다.
해가 더 저물기 전에 불을 피웠다. 조명을 설치하고 먹을거리를 꺼내 다듬었다. 이곳은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는 시설도 갖춰놓았다. 바비큐 테이블을 마련해 두었고 그 둘레에 앉을 수 있도록 접이식 의자도 충분하다. 개수 시설도 깔끔하고 화장실 역시 훌륭했다. 이 정도라면 굳이 이곳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하루를 보내도 충분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살아 있는 자연과 저렴한 가격, 훌륭한 시설의 삼박자가 매력적이다. 고기를 굽고 횟감을 떠서 나누어 먹는 사이 술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밤이 깊을수록 술은 모자랐지만, 충분히 행복한 밤이었다.
2일 차 일정은 우레시노 올레길 트레킹이 기다리고 있다. 원래 올레길의 시작점은 캠핑장 위쪽 정상부 쪽이지만, 주어진 시간 내에 모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올레길의 중반부부터 걷기로 했다. ‘교류의 숲’이라 명명한 원시림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숲이 얼마나 우거졌는지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이 만든 길에서 자연이 키운 숲으로 첫발을 디디고 보니 주변이 온통 산딸기밭이다. 길옆 안내판의 지도에는 너구리, 여우, 토끼, 멧돼지, 뱀, 두더지 같은 동물이 곳곳에 서식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좌우로 수십 미터 높이의 편백나무가 섰다. 편백나무의 도열이 끝나면 메타세쿼이아가 기다린다. 비슷해 보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나무껍질과 이파리가 다르다. 길은 대체로 내리막이다. 큰 힘들이지 않고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국인에게는 아주 익숙한 올레길 문양을 곳곳에서 만난다. 이 길 역시 제주도 올레길의 승인을 받아 개장한 트레킹 코스다. 규슈 올레길의 성공 이후 일본에는 곳곳에서 올레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일본에도 갈 곳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레시노 올레길은 두세 시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물론 완주를 목표로 한다면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울창한 원시림을 지나면 곳곳에 녹차밭이 펼쳐지고, 한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그 길을 따라 쭉 나아가면 작지만 멋들어진 폭포가 나온다. 우레시노 강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는 강변을 따라 걷는다. 걷는 행위가 힘들지는 몰라도, 코스 자체는 우레시노의 자연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올레길의 종점은 우레시노 시의 복판에 있는 시볼트 족욕탕이다. 종착점에 이르면 신발과 양말을 벗고 노천 족욕탕에서 발의 수고로움을 달랜다. 만족스러운 마무리다.
녹차를 곁들인 사가규 정식
트레킹의 끝자락인 사가현의 우레시노는 물이 좋다. 물이 좋으면 술도 맛있게 익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레시노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 양쪽으로 주조장과 온천이 모여 앉았다. 일본의 작은 도시는 어딜 가나 그렇듯이, 우레시노 역시 정갈하고 소박하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아서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녹차가 유명한 사가현답게 우레시노에서는 녹차 온천도 즐길 수 있다. 우레시노에서도 첫손에 꼽는 료칸인 ‘와라쿠엔’을 찾았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정원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숙소다. 웰컴 드링크로 나온 말차와 과자를 먹고 욕탕으로 향했다. 탕에 몸을 담그면 우레시노의 물이 좋다는 현지인의 이야기를 단박에 이해하게 된다. 잠깐만 들어갔다 나와도 매끈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는다. 여기에 정성 가득 느껴지는 만찬이 더해지면 최고의 저녁이다. 녹차의 고장에서는 역시 녹차를 더한 정식이 제격. 사가현은 바다가 가까워 해산물도 풍부할 뿐 아니라 ‘사가규’라 부르는 소고기가 이름이 높다. 사가현은 매우 엄격한 심사를 거쳐 등급 판정을 내기로 유명한데, 그중 최상위 등급으로 분류한 것에만 ‘사가규’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일본에서 ‘사가규’ 모르는 일본인은 없다.”라고 설명할 정도로 사가현의 자존심 그 자체다.
육지와 바다가 한 상에 담겨 차려졌다. 혀보다 눈이 먼저 호강한다.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플레이팅이다. 드러나지 않는 당당함이 있다. 혀의 뒤 끝에 오래 남지 않는 것부터 하나씩 음미한다. 적당히 숙성한 회는 차지고 초절임은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존재감을 피력한다. 그중에서도 대합과 고사리로 만든 초절임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음식은 함께 내주는 녹차가루와 함께 먹어도 좋다. 특유의 쌉쌀함이 입안에 남은 기름기를 말끔히 지우고 사라진다.
식사의 마지막은 화로구이. 사가현 다케오에서 나오는 특산품인 돼지고기와 사가규에 버금가는 품질의 이마리규, 사가규가 함께 상에 올랐다. 이마리규 역시 최상품이지만, 마블링은 사가규보다 덜 뚜렷하다는 게 한눈에 드러난다. 마블링이 화려하다는 건 지방이 그만큼 많고 잘 분포해 있다는 뜻이다. 물론 최근에는 마블링이 화려하다는 게 결코 쇠고기의 품질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유혹은 확실히 이겨내기 어렵다. 결국 순서를 돼지고기-이마리규-사가규로 정하고 하나씩 맛을 보기로 했다. 물론 녹차가루와 함께.
사가규에 대한 기대가 커서인지 다케오의 돼지고기에서 큰 감흥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입안을 정리하고 살풋 구워낸 이마리규를 입에 넣었다. 아, 이런 맛이구나! 갓 지어 단맛이 도는 쌀밥과 잘 어울리는 맛이다. 마지막 사가규의 차례가 왔다. 역시 화로에 직화로 구워 녹차가루를 더한 뒤 입안에 넣는다. 열이 가해진 지방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남은 살코기도 부드럽게 몇 번 씹히다 존재를 감췄다. 끝에 남은 쇠기름의 감칠맛이 밥을 부른다. 차이는 그랬다. 밥 한술로 완성하는 맛인가, 밥 한술을 부르는 맛인가. 그게 아닌가 싶었다.
한두 점만 먹었기에 아쉽지만 그래서 더 짙은 인상을 남겼다. 이 한상으로 사가현의 모든 것을 먹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왕이 부럽지 않은 저녁이었음은 분명하다. 이쯤이면 완벽한 주말여행이다. 더 바랄 게 없는 일본에서의 이틀이 그렇게 지나갔다.
한국인은 예부터 돼지고기보다 쇠고기를 더 선호했고 많이 먹었다. 쇠고기는 양질의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한 식품이다. 라이신 (lysine), 트레오닌 (threonine), 발린 (valine), 메티오닌 (methionine), 로이신 (leucine) 등 필수 아미노산과 올레인산 (oleic acid), 팔미틴산 (palmitic acid), 리놀레산 (linoleic acid) 등 지방산 및 각종 비타민 (A, B1, B2, PP), 칼슘, 유황, 인, 철 등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쇠고기의 단백질은 식물성 단백질보다 체내 흡수율도 높다. 제허백손(諸虛百損)을 보한다고 하여 고급 요리의 재료로 사용했고, 특히 소에서 나오는 우황은 소아 경풍, 간질, 뇌염, 뇌막염 같은 시각을 다투는 질환에 쓰던 귀한 약재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