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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은 바다를 곁에 두었음에도 좀처럼 해양도시의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 그건 아마도 한국의 경제를 일으키는 주춧돌이었던 포항제철의 이미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포항은 해양도시로의 매력이 충분한 곳이다.



코발트 빛 바다의 도시 포항


예전에는 수도권에서 포항을 가는 게 쉽지 않았다. 한반도의 등줄기 너머 동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순탄한 길을 찾아 한참을 둘러가야만 했다. 6시간 이상 소요되는 걸 감수해야만 비로소 포항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랬던 포항이 가까워진 건 KTX가 뚫리면서부터. 이제는 서울역에서 3시간 남짓이면 포항에 발을 디딜 수 있다.


포항이 가까워지면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포항을 본다. 이전까지 포항은 중공업 도시의 이미지가 강했다. 포항제철이라 부르던 기업이 버티고 있었고, 포항공대는 이공계열의 인재를 품어내는 요람이었다. 바다를 곁에 두르고 있음에도 포항은 해양도시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비로소 포항의 바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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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바다는 동해 특유의 코발트 빛을 가졌다. 하얀 백사장 너머로 하얀 포말을 뿜어내는 파도를 밀어 보내 서퍼의 마음을 뒤흔든다. 아직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일만항 왼편으로 파도가 고개를 곧추세우고 밀려들 참이면 어김없이 이쪽 지역의 서퍼들이 모여든다. 햇살이 화창한 날이든 비가 흩뿌리는 날이든 개의치 않는다. 파도만 있으면 그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영일만은 이제 막 동해안의 새로운 서핑 명소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여느 바닷가가 그렇듯, 포항도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던 도시다. 포항이 몸집을 키우고 도시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점이었다. 이곳은 한반도에서 나오는 물산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기착지였다. 풍성한 해산물이 있어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 나라를 먹여 살릴 기반 산업인 제철소를 지어 새로운 기능을 부여했고, 그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포항의 바다를 잊고 있었을 뿐이다.


포항이 해양도시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고 싶거든 죽도시장으로 향하길 권한다. 죽도시장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수산시장이자 물류의 집결지다. 포항 인근 바다에서 나온 싱싱한 수산물은 대개 이곳으로 모여 전국으로 흩어진다. 여명이 밝아올 무렵 포항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는 곳 역시 죽도시장의 수협 죽도위판장이다. 매일 아침 5시부터 이곳은 시끌벅적하다. 어지간한 어른 키에 맞먹을 체장을 가진 대문어가 이곳에서 팔려나가고, 나팔고둥이니 청어, 전갱이, 한치, 갑오징어, 대구 같은 것들이 시장 바닥을 가득 메운다. 땀 냄새와 바다의 짠 내 가득한 그 현장을 보고 있자면, 포항은 바다의 도시임을 다시 한 번 각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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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벼 먹는 포항물회의 매력


포항은 은근히 먹을 게 많은 동네다. 경상북도에 먹을 게 뭐 있느냐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포항은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꽤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과메기. 전라도에 홍어가 있다면 포항에는 과메기가 있다. 물론 지금은 과메기 시즌이 아니니 다른 먹거리를 찾는다면 물회가 적당하겠다.


이제는 물회가 어디를 가나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됐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물회라는 음식이 있다는 걸 1990년대 중후반 처음 알린 지역이 포항이다. 포항의 물회가 유명세를 타면서 서해, 남해 가릴 것 없이 바닷가라면 으레 물회가 등장했다. 원래 물회라는 음식은 배 위에서 일하던 선원들이 빠르고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먹던 것. 바로 잡은 회 위에 채소를 얹고 차가운 국물을 부어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단순하지만 새콤한 첫맛과 매콤한 마무리가 입맛을 돋운다.


포항물회의 명성을 아는 사람은 포항 여행에서 빼놓지 않고 물회를 찾아 먹는다. 그러나 포항 현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행자 대부분은 포항사람들이 즐겨 먹는 포항물회를 잘 모른다. 얘기인즉슨 포항사람이 즐기는 전통적인 물회의 방식은 국물을 부어 먹는 게 아니란다. 회와 채소 위에 얹어진 고추장 양념을 그대로 비벼 먹는 게 포항식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러니 포항사람의 눈에 국물을 부어서 먹는 물회는 외지인이 선호하는 방식인 셈. 물회 이야기가 나오면 포항사람들은 비벼 먹는 물회를 두고 ‘전통 물회’라는 표현을 쓴다.


현지인과 여행객이 찾는 물회가 다르다 보니 서로 찾아가는 가게도 차이가 있다. 포항 현지인은 여행객이 찾는 물횟집을 가지 않는다. 외지인인 여행객은 ‘전통 물회’를 몰라서 찾지 않는다. 외지인이 선호하는 물회가 인기를 끌면서 꽤 오랜 시간 비벼 먹는 물회를 내는 가게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아직 포항 여기저기에 물회를 간판에 내건 가게가 많이 보이지만, 한창 물회가 인기를 끌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긴 했다.



물회의 댄디한 변신


그런데 이런 전통 방식의 물회도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포항식 물회의 댄디한 변신이랄까. 최근 인기를 끄는 포항물회 가게가 있다고 해서 찾았다. 영일대해수욕장을 마주 보고 있는 ‘동원해물촌’이라는 집이다. 외관부터 여타의 물횟집과는 완전히 달랐다. 물회를 파는 가게라기보다는 마치 카페와도 같은 외관과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그동안 우리가 쉽사리 접했던 물회 가게의 이미지는 그리 세련된 느낌이 아니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에 붙은 메뉴는 대개 단출하다. 물회는 냉면 사발 같은 그릇에 담겨 나온다. 이 시기의 물회에는 가자미를 주로 넣는다. 간혹 가자미와 광어를 섞어서 내는 집도 있다. 그 위로 수북하게 얹어낸 채소는 보기에도 든든했다. 음식은 적당한 크기의 양은 쟁반에 밑반찬 몇 가지와 밥 한 공기를 함께 올려서 가져다주는 편이었다. 이게 지금까지 보았던 물회 가게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 집은 좀 많이 다르다. 딱 한 사람 분량의 음식이 가지런한 목쟁반에 담겨 나온다. 반찬도 과하지 않아 보기에도 좋은 상차림이다. 마치 슬랙스에 리넨 셔츠를 걸친 것 같은 말끔한 느낌이랄까. 동원해물촌은 겉보기에 새로 생긴 집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혜성처럼 나타난 그런 집이 아니다.


동원해물촌이 문을 연 것은 1984년이다. 작은 구석의 자리에서 시작해 오랫동안 포항사람들로부터 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포항의 노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역사를 가진 가게였다. 그러던 2013년, 동원해물촌은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외지 관광객이 국물을 부어 먹는 물회를 주로 찾으면서 운영이 어려워졌고 결국 5년간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임대해주기로 하고 간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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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맛과 모던한 센스의 조화


동원해물촌의 부재는 꽤 많은 사람에게 아쉬움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30년의 역사를 한순간 뒤로 하고 문을 닫았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 간판이 다시 내걸린 건 올해 5월. 예전 그 자리에서 잠시 끊어진 역사가 다시 이어졌다. 창업주인 정원재 씨의 손자 정주락 씨가 3대 사장을 맡아 운영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그는 올해 5월 노포의 문을 다시 열면서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하고 메뉴도 재편했다. 그러나 예전에 만들던 그 방식에서 변한 건 전혀 없다. 맛도 예전 그대로다.


동원해물촌이 돌아왔다는 소문에 옛 단골들이 가게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주목할 점은 젊은 층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이 나고 있다는 것.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SNS에 영일대해수욕장의 맛집으로 이 가게의 존재를 알렸고, 호평은 꼬리를 물고 새로운 손님을 끌어왔다. 이 집을 찾았던 날 점심시간에도 가게를 채운 손님의 90퍼센트 이상이 20~30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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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횟집이라고 해서 물회만 내는 건 아니다. 전복을 넣어서 개발한 메밀국수도 있고 새우장 비빔밥도 있다. 게살 비빔밥도 인기다. 전복죽은 물회의 인기를 뛰어넘는다. 메뉴에 따라 국도 따로 낸다. 물회에는 서더리탕, 새우장 비빔밥에는 조개탕, 메밀국수에는 전복죽 같은 식이다.


동원해물촌은 모던한 포항물회라는 점이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곳이다. 모던하지만 알고 보면 포항 전통의 맛.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면서 신선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맛도 깔끔하다. 입안에 남는 뒷맛이 텁텁하지 않아 더 좋았다. 포항의 물회가 궁금하다면 찾아가 볼 만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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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에서 가자미는 '성질이 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어 허약함을 보충하고 기력을 회복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포공영 (蒲公英, 국화과의 민들레 혹은 동속 식물의 전초를 말린 약재)과 함께 먹으면 변비와 생리불순에 효과를 보이고, 천년초 등 비타민 C 함유량이 높은 재료와의 궁합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동북부 지역에서는 발효음식인 '밥식해'를 만들 때 가자미를 넣는다. 발효·숙성 과정에서 가자미의 단백질이 아미노산으로 분해돼 글루탐산 (glutamic acid), 라이신 (lysine), 트레오닌 (threonine)과 필수지방산 등이 풍부한 영양 식품으로 탈바꿈한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