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이라는 음식이 조명을 받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화 <식객>에서 육개장에 얽힌 스토리가 주목을 받았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육개장을 조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게 2000년대 중반쯤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대구탕’이라 불리던 음식
영화 <식객>에서 묘사한 육개장 이야기는 이렇다. 나라를 잃은 임금이 찾았던 음식, 소고기국을 요리하는 마지막 미션에서 등장하는 게 육개장이었다. 나라를 잃고 식음을 전폐하며 시름에 잠긴 순종 임금에게 대령숙수가 올렸던 쇠고기국, 그게 바로 육개장이었다는 내용이다. 평생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를 상징하고, 고추기름은 맵고 강한 조선인의 기세를, 어떤 병충해도 이겨내는 토란대에는 외세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을 상징한다는 내용이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음식이 바로 육개장이라는 게 <식객>의 절정부를 이룬다. 영화에서 육개장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조선의 정신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사실 그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과 각색이 더해지긴 했다. 음식에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케이스이긴 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다. 사실 육개장은 소고기가 들어간 음식이라는 점에서 서민의 음식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래서 조선 후기 당시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지역, 그러니까 경북지방에 육개장이 많이 발달했다고 보는 의견이다.
실제로 경북지역은 육개장이 유명하다. 특히 육개장을 이야기하면서 대구를 빼놓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면 육개장을 아예 ‘대구탕’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아는 생선 대구가 들어간 대구탕이 아니다. 그만큼 대구는 육개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여러 가지 설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살펴볼 만한 이야기는 대구가 육개장의 발상지라는 이야기다. 1926년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서울 공평동에도 대구탕반이라는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 있다.’, 그리고 1929년 <별건곤>이라는 잡지에 실린 ‘달성인’이라는 익명의 필자가 쓴 글도 참고해볼 만하다. ‘대구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를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 사람들의 통성이지만, 특히 남도 지방 시골에서는 사돈 양반이 오시면 개를 잡는다.’ 중략하고 좀 더 보자. ‘간단하게 말하면 쇠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큰 발전을 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대구는 육개장의 발원지일까? 글쎄, 그게 꼭 그렇게만 단정 짓기에는 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영주나 안동 쪽에서 시작된 육개장이 대구에서 활성화됐다는 주장도 무시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후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 육개장이었다, 이것만큼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 듯하다.
음식을 이야기할 때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게 “다 똑같지 뭐”라는 말이 아닐까. 특히 한국 음식은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다. 똑같은 김치여도 전라남도에서 담근 것과 경상북도에서 담근 것이 같을 리 없다. 이제는 전라도식이니 경상도식이니 구분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대체로 밥상에 얽힌 배경쯤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육개장도 마찬가지다. 대구의 육개장은 국거리 고기를 물러질 정도로 푹 삶은 뒤에 파를 많이 넣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파에서 우러나온 진득한 단맛이 대구 육개장의 성격을 보여준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반면에 대구의 육개장이 건너간 서울식 육개장은 처음부터 고기를 잘게 찢어서 요리했다. 고명이 되는 채소나 당면 같은 것도 훨씬 복잡해진다. 이렇게 대구식 육개장은 그 특징이 명확했다. “먹을 거 없는 대구 뒷골목에서 육개장이나 한 그릇 먹고 오자.”라고 말하기에는 그 한 그릇에 담긴 역사와 손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무참하다.
칼칼하고 진득한 대구식 육개장의 진미
대구식 육개장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집은 대략 8곳 정도를 거론한다. 음식사회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8곳 모두 파가 많이 들어간다, 마늘도 많이 들어가더라, 때로는 부추를 많이 넣는 곳도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쇠기름에 고춧가루를 넣어서 만든 고추기름으로 얼큰한 맛을 낸다는 점이다. 육개장은 국에 고춧가루를 직접 넣어서 만드는 음식이 아니라 쇠기름에 빨간 고춧가루를 넣어 매콤한 감칠맛을 더해 만드는 음식이다. 그래야만 육개장이 온전히 육개장일 수 있다.
글 쓰는 요리사로 이름이 높은 박찬일 주방장은 음식사회학 분야에서도 뚜렷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대구의 육개장을 설명하면서 꼭 언급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바로 파다. 박찬일 주방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탕’에 넣었던 파는 지금 우리가 먹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다끼파’라고 불리는 종이었는데, 이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종자회사인 ‘다끼’가 국내에 퍼트렸던 종이라고. 크기부터 현재 우리가 먹는 파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뿌리파’ 계열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파는 잎을 먹는 잎파 계통이다. 그런데 뿌리파 계열인 다끼파는 아주 매운맛이 났다는 기록이 있다.
다끼파가 들어가면 단맛도 단맛이지만 매운맛을 더욱 맵게 도와주는 효과가 있어서 육개장을 진국으로 만들었다고. 아쉽게도 이제는 그 명맥이 끊어져서 더 이상 맛을 볼 수 없게 됐다. 불과 100여 년 전 대구에서 흔하게 먹던 그 맛이 이제는 영영 사라진 셈이다. ‘그깟 파 하나’에도 우리가 먹는 음식은 오묘하게 차이가 생긴다. 음식을 놓고 “다 똑같지 뭐”라는 말을 삼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대구 여행을 하면서 “대구는 먹을 게 없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꼭 반월당 인근에 있는 진골목에 가보라.”라고 말한다. 이제는 근대역사골목으로 적잖은 주목을 받고 있는 곳이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개발의 시야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오래된 골목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골목 안에는 근대기 우리의 삶과 흔적이 수두룩하게 남아있다. 익숙하다고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그런 면에서 대구 근대역사문화골목이 주목받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이 골목 안에 우리가 가볼 만한 육개장 가게가 있다. ‘진골목 식당’이라는 곳인데, 대구의 근대역사문화골목이 주목받으면서 이 집도 덩달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 집은 100칸짜리 옛 가옥의 일부다. 오래된 집의 한자리를 빌려 육개장을 한 그릇 턱 말아먹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집이다. 몇 년 새 잘 알려진 육개장 칼국수, 이른바 육칼의 맥을 이어오던 곳도 바로 이 집이었다. 아침 일찍 부지런히 이 집의 문지방을 넘어서면 수북한 파를 넣고 육개장을 팔팔 끓여내는 진풍경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예전 대구의 어른들이 먹던 육개장은 이런 맛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진득하고 칼칼하다.
이 집과 더불어서 꼭 언급하게 되는 집이 있다. 따로국밥으로 유명한 ‘국일따로국밥집’이다. 따로국밥이라는 음식의 원형은 육개장이었다. 국에 밥을 토렴해서 내주는 여타의 국밥과 달리 육개장은 밥 따로 국 따로 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따로국밥이다. 덧붙이자면, 육개장은 해장국으로도 많이 소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의 탕반을 살피다 보면 반드시 육개장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선지가 들어가는 유무에 따라 해장국으로 보느냐 육개장으로 보느냐가 갈렸던 것 같다.
파는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에 먹으면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가래를 없애준다. 녹색 부분에 비타민 A가 많아 눈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뿌리에는 알리신 (allicin) 성분이 많은데 이는 마늘의 독특한 냄새를 내는 물질로 강한 살균·항균 작용 외에도 혈액순환, 소화촉진, 당뇨병 및 암 예방에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정태겸 기자의 길 위에서 찾은 밥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