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상(藥象)의 의의 


분자 단위의 연구가 아무리 완벽하게 쌓여도 그 분자들의 집합체인 세포들의 떠오름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물리학의 "환원주의에 대한 반성"은 세포들로 이루어진 식품의 기능을 성분위주의 설명으로 밝힐 수 없다는 점을 확실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환원주의적이고 성분중심적인 그러한 부분적 논리를 확실하게 배제하고, "생명이 있는 자연물 그대로, 자연의 산물들 상호간의, 특히 인체와의 관계 정립에 대한 설명에는 어떤 공통용어가 기본적으로 필요한가?" 라는 매우 근원적인 연구와 비판이 필요하였다.


"만일 자연계의 본초들이 인체 등 다른 생명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연구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설명도 부여할 필요가 없다."라는 입장에서 필요 불가결한 공통 원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 필요하였다. 본초들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건 말건 그 자체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면 본초 내부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현대 과학적인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상호 관계가 없으면 존재의 의미도 없으므로 내부에 대한 설명보다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공통 원칙과 용어'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학이든 의학이든 동양의 학문은 모두 이원적일원론(二元的一元論)으로 시작한다. 서로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개의 개념으로 물질이 이루어졌다면, 반드시 둘이 하나로 합해질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여자가 결혼 상대를 고를 때 형체인 외모만 본다거나 혹은 외모는 전혀 보지 않고 형체가 없는 성격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초에 대한 평가는 맛과 성질을 따로 구별하여 평가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버렸다. 특히 성질의 한열(寒熱)만으로 본초를 평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는 본초에 대한 부분적인 논리를 배제하고 전체적 논리로 인체와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한의학적 의도와 정 반대의 발상이요 행위이다.


필자가 중국 약선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를 5년 정도 했을 때부터 이상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 하였다.


첫째, 본초의 맛과 성질을 하나로 묶어서 표현해야 그 본초에 대한 전체적 논리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객관성 있는 설명 방법이 있어야 연계되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둘째, 맛과 성질의 개념을 현대적인 다른 학문을 빌어서라도 재 해석함으로써 본초의 본체에 대한 어떤 객관성 있는 존재 원칙을 찾아 내어야 연계되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안지 같은 이론을 중국 금대(金代) 이동원(李東垣) 선생의 『동원시효방(東垣試效方)』 "약상문(藥象門)"에서 찾아 내어 9년 동안 활용하다가 마침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방법을 찾아 냄으로써 오늘날의 '약선설계'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두 번째 거론한 맛과 성질에 대하여 열역학적 개념을 활용한 필자 개인적인 재해석을 제안하면서 곁들여 이동원식 약상 분류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초의 맛과 성질을 하나로 묶어 표현한 것을 『동원시효방(東垣試效方)』에서는 '약상(藥象)'이라고 표기하였다.


설하(泄下)


혹한의 한 겨울을 살아남기 위해서 지상부분의 가지와 잎은 버리고 땅 속의 뿌리에 모든 영양소를 저장한 채 겨울을 나는 [그림 1]의 식물 뿌리 'P'는 약상문에서 설하(泄下)로 분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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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에서 P와 E와의 관계를 열역학적으로만 보면 P보다 E의 온도가 낮기 때문에 열에너지가 P에서 E로 옮겨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P는 일정한 온도를 지켜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열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결국 P 내부에 다음과 같은 욕구의 결과물을 조성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한의학적 결론을 역추적한 가설이다.


가.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게 수렴하려는 욕구가 그 결과물을 조성할 것이다.
나. 입자간격을 좁혀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욕구가 그 결과물을 조성할 것이다.
다. 외부로 나가려는 에너지를 대신 흡수했다가 다시 내부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물질을 생성하고자 하는 욕구가 그 결과물을 조성할 것이다.


『황제내경』에서 맛에 관하여 동양적으로 표현한 구절들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해보면, '가'와 같은 경위로 조성된 물질은 사람의 혀에서 '신맛'을 느끼게 되고, '나'는 '쓴맛', '다'는 '짠맛'을 느끼게 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또한 맛의 생성은 땅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고 땅속에서 흡수한 물질들로 조성되기 때문에 "맛은 땅에서 온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P와 A의 관계가 P와 E의 관계와 다른 점은 A가 기체이고 끊임없이 P의 내부를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한 P의 구조가 고체로 형성된 틀과, 그 사이 사이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명체의 기능 활동을 하는 자유입자들의 활동 공간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A는 바로 이 공간에 머물면서 자유입자들과 하나처럼 존재한다는 점을 상상해야 한다. 자유입자들은 자신보다 온도가 낮은 공기-량(凉) 혹은 한(寒)-가 들어올 때 수렴한다거나 단단해지려는 욕구에 의한 모종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특성을 지닌 본초가 인체에 투입되면 인체의 기능변화에 그 특성이 관여를 한다고 보는 것이 바로 본초의 성질에 대한 한의학적 관점일 것이다.


이 성질이 P의 틀 속에 생성된 물질의 맛과 하나처럼 얽힘으로써 그 본초의 상(象)이 떠오르게 된다. [그림 1]에서는 상기한 맛-신맛, 쓴맛, 짠맛- 중 어느 하나 혹은 그 이상과, A와 같은 성질-한(寒)-이 어우러져 설하(泄下)의 약상을 띄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약상명은 본초의 본체를 분류하여 규정하는 용어이지, 인체에 대한 효능을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다. 통계를 내어 살펴 본 결과 '설하'로 분류되는 식용본초의 32.5%가 청열(淸熱), 13.8%가 해독(解毒)의 용도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16가지의 각기 다른 효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 본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KMCRIC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 안문생 박사의 약선 설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