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같은 성격은 말을 잘 안하고 속에 있는 말 안 뱉고 그래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뭐라고 해야 되는데, 남편한테도 싫은 소리를 하기 싫은 거예요. 내가 조금 참고 말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고 말지 그러면서도 화가 나는 거죠. 저 스스로가 거의 맞춰 주려고 하는 쪽이에요. 웬만하면 일이 크게 안 벌어지게끔.”
얼마 전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화병·스트레스클리닉을 찾은 50대 주부가 상담을 통해 털어놓은 얘기다. 집안일과 남편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로 생긴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수년간 억누르고 살아오면서 화병 (火病)을 얻게 됐다고 했다. ‘참는 화병’의 전형적 모습이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참고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화병은 그간 여성 (특히 주부), 40대 이상 중장년층, 사회적 약자에게 특화돼 많이 설명됐다.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상황을 반복 경험하면서 심리적 증상보다 가슴 답답함, 치밀어 오름, 얼굴의 열감 (화끈거림), 명치에 뭔가 걸린 느낌 같은 신체적 고통을 주로 호소했다.
화병은 한의학의 울화병 (鬱火病)에서 비롯됐다. 막힘과 분노의 감정을 겪는다는 의미다. 미국 정신의학회 진단 편람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한 (恨)문화에서 형성된 정신질환 (영어표기: Hwabyung)으로 소개돼 있다.
분노 표출 화병 증가세
최근 몇 년 사이 화병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참는 화병에서 분노 표출형 화병 환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 교수는 21일 “화를 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아 병이 되는 경우가 아직은 더 많다”면서도 “화를 참지 못해 여러 행동적인 증상을 나타내는 화병으로 점차 변화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 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폭언이나 폭력 행동으로 이어지곤 한다. 분노 표출형 성격이라면 양상은 더 심하다. 남성, 젊은 사람, 직장인이나 학생, 사회적 강자에게서 주로 관찰된다.
표출하는 화병은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며 주변 사람들은 ‘환자가 화를 쉽게 낸다. 화를 심하게 낸다’고 대부분 인식하고 있다. 이 경우 환자는 신체 증상보다는 화를 내는 정서적 측면 그 자체 때문에 고통을 호소한다.
화병 클리닉에 발걸음을 한 30대 직장 남성의 상담 내용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이 제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으면 화가 나요. 너무 화가 나서 물건을 집어 던지고 속으로 ‘왜 이것도 이해 못 해주지’ 이런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이제는 너무 쉽게 화를 냅니다. 그러고는 또 후회하죠. 참을 수 있어야 하는데 참는 게 어렵습니다.”
김 교수는 “화병을 오랫동안 참아서 오는 병으로 설정해 6개월이라는 참는 기간을 진단 기준으로 설정했지만, 화를 참지 못해 발생하는 병이 늘면서 기간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매우 짧은 기간에 화를 참지 못하고 강하게 표출하는 병을 이전의 화병과 구분해 ‘급성 화병’ 혹은 ‘격분 증후 화병’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 경우 즉각적인 분노의 표출이 잦고 증상도 행동으로 드러난다. 폭발적으로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는 행동이 반복된다. 김 교수는 “요즘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묻지마 폭력이나 홧김 방화들이 대부분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분노 양상과 무관치 않다”면서 “특히 10∼30대 젊은 층에서 급성 화병이 느는 추세”라고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화병 (한방 질병코드: U222) 진료 환자는 2015년 1만2,700명에서 지난해 1만3,872명으로 10% 가까이 증가했다. 지난해 화병 환자를 연령대별로 보면 50대 22.6%, 60대 19.2%, 40대 15.1% 순으로 많았다. 30대 이하가 29.1%로 화병 환자 10명 중 3명꼴이었다. 3년간 연령별 환자 추이를 보면 10대 (75.0%)와 20대 (73.2%) 30대 (42.6%)의 증가율이 두드러졌다. 40대 이상은 근소하게 증가하거나 오히려 줄었다.
가진 자들의 학습된 분노
급성 화병이나 격분 증후 화병은 서양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간헐적 폭발 장애’ (일명 분노조절장애)와 비슷하다. 심평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이 정신장애로 병원을 찾은 사람은 1,873명으로 2013년 (1,395명)보다 34.3% 증가했다. 10∼30대 환자가 상당수 (2017년 56%, 2013년 74.9%)를 차지했다. 이 질환 역시 공격성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게 특징이다. 사람을 폭행하거나 물건을 부수는 등 파괴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분노 행동이 일어난 후에는 안정을 찾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도 많다. 이른바 가진 자들의 ‘학습된 분노’가 여기에 해당한다. 최근 ‘물컵 갑질’로 사회적 비난을 받는 대한항공 총수 모녀가 등장하는 음성파일이나 동영상 속에 드러난 분노 폭발이 대표적이다.
김 교수는 “분노를 표출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일찍이 경험한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분노를 습관적으로 터뜨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그들은 분노를 통해 쾌감을 느끼고 분노를 푼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온다”면서 “한마디로 ‘분노의 학습’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분노는 억울하고 분한 사람들이 풀어내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어야지 권력 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감정이 돼선 안 된다”고 일갈했다.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자꾸 늘어날까. 빈부격차 등 사회의 불공정성이 커지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생겨나면서 구조적 스트레스 상황이 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 참는 게 미덕이라는 사회 분위기가 사라지고 그만큼 사람들이 참는 능력도 떨어지면서 분노 표출형 화병 환자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김형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특히 요즘 20, 30대 젊은이들은 7포 세대 (취업, 결혼, 출산, 주택, 취미, 희망,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세대)로 불릴 만큼 기본적인 사회욕구조차 포기를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정신분석학에서는 좌절된 욕구가 분노를 만들고 이것이 공격성으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공격성이 내면 밖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폭력을 만들고 내면의 자신을 향하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전문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사실과 분노조절장애 환자의 증가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좌절된 사회욕구가 만든 공격성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종우 교수는 “예전엔 화병 환자들에게 ‘참아서 생긴 병이니 무조건 참지 마라’고 상담했는데, 지금은 너무 자주 분노를 폭발하는 게 문제여서 어떻게 화를 삭일 것인지가 치료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고 말했다. 분노 폭발 성향이 커 총기 사고가 잦은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분노 관리 (anger management)’ 연구가 활발히 진행돼 왔다. 분노 표출형 화병이 증가 추세인 우리나라도 화 관리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쏟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분노 현장 벗어나자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분노의 경우 화를 참는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좋지 않다. 화를 내는 것은 교감신경을 지나치게 흥분시켜 혈압 상승을 부르고 과잉 행동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찰스 스필버거 (Charles D. Spielberger)가 제작한 분노 반응 척도를 보면 분노 억제 (anger-in)와 분노 표출 (anger-out)이 모두 문제가 있으며 바람직한 것은 분노 조절 (anger-control)이다. 기본적으로 화를 참는 기술이 필요한 셈이다. 김 교수는 “분노가 일어나서 정점에 도달하는 데는 15초가 걸리고 그 가운데 3초가 분노와 짜증을 증폭시킬지, 혹은 잠재울지 결정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불과 3초 안에 분노는 기름에 불을 붙인 것처럼 확 타오르기도 하고 채 불이 붙지 않고 꺼지기도 한다.
그 짧은 시간에 화가 불붙지 않게 하려면 일단 현장에서 벗어나는 게 좋다. 분노를 유발한 상황이나 장소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즉시 나타난다. 이후 분노를 조절하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10분간 심호흡하기, 20분간 차 마시기, 30분간 걷기 등이 권장된다. 분노가 막 차오를 때는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쉬는 게 좋다. 화를 다스리는 데 좋은 박하차, 국화차, 구기자차, 귤피 (말린 귤껍질)차를 마시는 것도 한 방법. 아무리 화가 나도 숲속 길을 무작정 걷다 보면 수그러들기도 한다. 김 교수는 “평소 다니던 익숙한 길, 처음 가보는 생소한 길을 걷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눈을 감고 산책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잦은 분노 표출로 인간관계에 곤란을 겪거나 쉽게 열이 오르는 증상이 반복되는 단계에 왔다면 서둘러 전문의의 치료를 받는 게 바람직하다.
출처: 국민일보 김종우 교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