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동화약품과 유한양행은 독립운동에 힘썼던 기업들이다. 동화약품은 1897년, 유한양행은 1926년 설립돼 민족의 풍파를 함께 했다. 두 회사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뒤에도 사회 공헌 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화약품 창업주 민강 선생
동화약품은 소화제 활명수 개발과 함께 설립됐다. 올해로 창립 127년째다. 조선 후기만 해도 사람들이 급체나 구토와 설사가 동시에 발생하는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동화약방(현재 동화약품)을 창업한 민강 선생이 부친이 개발한 활명수를 판매한 것이 동화약품의 시초다. 활명수는 살릴 활(活), 목숨 명(命)을 써 당대엔 ‘생명을 살리는 물’로 통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활명수를 판매한 돈이 독립자금이 됐다. 민강 선생은 1919년 3·1운동 이후 동화약방 건물에서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잇는 서울연통부를 운영했다. 독립운동과 관련해 국내외 정보를 수집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활명수를 가져가 팔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일본인이 중심인 한국약제사회 가입을 거부하고, 서울대 약대의 전신인 조선약학교를 설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민강 선생이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뒤 윤창식 선생이 동화약방을 인수했다. 윤창식 선생은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하고, 빈민을 도운 보린회와 신간회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윤창식 선생의 동생인 윤광열 회장도 중국 상하이로 가 광복군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도 항일조직과 특수공작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어릴 적 미국에서 생활했던 유 박사는 1909년 미국에 설립된 한인소년병학교에 들어갔다. 오전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와 군사훈련을 받는 생활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했다.
유 박사는 한국으로 귀국한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기술 인재를 양성해 민족의 역량을 높이는 게 독립과 국가 발전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건강한 국민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신념도 있었다.
유한양행의 해외 지사는 독립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만들어졌다. 유사시에는 항일운동의 지하조직 거점으로 운영했다. 유 박사는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쳐갔다. 특히 1941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전략정보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1945년엔 재미 한인을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교란하는 ‘냅코(NAPKO)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유 박사는 1971년 타계하면서 유한양행 소유 주식을 공익법인인 유한재단에 남겼다. 유일한 박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했고, 기업 경영사에 남을 선진적인 일을 실천했다. 민족을 위한 제약기업과 조국 독립을 위한 열정을 사회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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