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2018년 7월 국제 협업 취재를 통해 와셋과 오믹스 등 가짜 국제학회에 대해 보도한 후, 국내에도 이와 유사한 부실 학술단체가 운영하는 국내 학술지와 학술대회가 성행하고 있다는 제보를 여러 건을 받았다.
뉴스타파는 이들 제보 내용을 취재한 결과, 서울 한 사립대 현직 교수가 주식회사와 역외 페이퍼컴퍼니까지 만들어 국내외에 여러 학술단체를 운영하면서 사실상 수익 사업을 벌여온 사실을 확인했다. 학술지 논문 게재료와 학술대회 등록비 등을 학회 명의의 법인 계좌 외에도 가족과 측근들의 이름을 동원한 차명 계좌를 통해 받았고, 페이퍼컴퍼니도 결제 회사로 활용한 사실이 드러나 수사 당국과 조세 당국의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김태훈 교수, 최소 7개 학술단체 만들어 기업군처럼 운영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보안학과 김태훈 교수는 가족 및 학계 지인들과 함께 국내외에서 다수의 학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해외에 적을 둔 출판사와 논문게재료 등을 받기 위한 페이퍼컴퍼니도 만들었다.
김 교수 등이 설립한 학술단체 중 뉴스타파가 먼저 주목한 학회는 보안공학연구지원센터(SERSC, 이하 보안공학센터)다. 사단법인으로 운영되는 일반적인 학회들과 달리, 이 보안공학센터는 주식회사다. 취재 결과, 이 회사 대표자로 등록돼 있는 78살 민 모 씨는 김 교수의 어머니인 것으로 드러났다. 학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보안공학센터 감사는 김 교수의 제자인 최 모 씨로 돼 있다.
김태훈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7개의 학술단체들을 서로 연계시켜 학술지를 출판하고, 학술대회와 워크숍을 수시로 개최했다. 보안공학센터는 김 교수가 법인 대표이사로 올라 있는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HSST, 이하 융합학회)의 학술지를 위탁 출판하고, 학술대회나 워크숍을 위탁해 조직·운영한다.
김 교수가 구축한 학술단체 조직에 속한 아태인문사회과학기술교류학회(SoCoRI, 이하 소코리)와 아시아태평양학술산업서비스(APAIS, 이하 아파이스)는 비교적 규모가 큰 융합학회 및 보안공학센터와 연계해 국제학술대회와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국제학회로 꾸며놓은 아파이스를 통해 국내 연구자들의 국제학술지 투고 및 국제학술대회 참여 수요까지 흡수하고 있다. 또한 소코리와 아파이스 등의 국제학술대회 프로시딩이나 학술지는 김태훈 교수가 소유한 호주 소재 글로벌비전스쿨출판사(Global Vision School Publication)에서 발간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국내에서 개최한 학술대회 등록비와 학술지 게재료는 김 교수가 사장인 국제학술컨설팅서비스(이하 IACS) 이름을 병기한 개인 명의 계좌 등으로, 해외 학술지 또는 학술대회 관련 결제는 해외에 있는 아파이스 명의의 페이팔 계정으로 처리하고 있다.
논문 한 건 게재료 많게는 백만 원, 개인 명의의 계좌로도 받아
김태훈 교수가 운영하는 학술단체 조직의 수익은 국내외 학술지와 학술대회 사업을 통해 창출된다.
융합학회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재 학술지 2종을 각각 연 6회, 연 12회 발간한다. 학술지 한 권에 많을 때는 논문 90편까지 싣기도 한다. 연구자가 이 학술지에 논문 한 편을 게재하려면 사사 표기 요금까지 합쳐 50만 원이 넘는 돈을 내야 한다.
특이하게도 이 학회는 국제학술대회 참석자들에게 영어가 아닌 한글 논문 투고를 장려한다. 국제학술 관련 실적을 필요로 하지만 영어로 논문을 쓰기 어려운 연구자가 이 서비스의 대상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서비스를 이용해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려면 번역료를 포함해 120만 원가량의 게재료를 지불해야 한다. 취재진은 실제 이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는 한 연구자가 학술대회 참가비와 한글 논문 번역비까지 합해 150만 원 넘는 금액을 지불한 사례도 확인했다.
김태훈 교수의 학술단체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김 교수의 차명 계좌로 쌓을 수 있는 구조를 갖췄다. 이 단체들은 법인 명의의 계좌를 보유하고 있지만 취재 결과 이들이 연구자들에게 게재비나 참석비를 이체하라고 안내하는 계좌들 중 일부는 김 교수 측근들의 개인 명의 계좌인 것으로 드러났다. 학회 법인이 아니라 김 교수 혹은 그의 측근에게 돈이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김 교수가 사장으로 돼 있는 페이퍼컴퍼니의 정체도 의문이다. 학회 운영 및 결제 회사 IACS는 주소지가 홍콩 침사추이 소재 한 사무실이다. 이 주소는 역외 페이퍼컴퍼니 설립 브로커 역할을 하는 한 회계법인의 주소와 일치한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역외탈세 데이터베이스에도 이 주소를 쓰는 페이퍼컴퍼니 6개가 검색된다.
‘KCI 등재지’ 타이틀로 날개 단 김 교수의 학술 사업
김태훈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학회 중 가장 규모가 큰 융합학회의 경우 회원이 7천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융합학회에 이렇게 연구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김 교수가 발간하는 여러 학술지 가운데 ‘보안공학연구논문지’와 ‘예술인문사회 융합멀티미디어논문지’ 등 두 종이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이하 KCI)에 등재돼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구 관리 당국과 대학 등의 국내 연구 기관들은 SCI, Scopus 등 이른바 국제 저명 색인과 KCI에 등재된 학술지 게재 논문을 주요 실적물로 인정한다. 연구자가 이 같은 주요 색인에 등재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 일반 학술지에 게재할 때보다 임용·승진·재계약 등 인사 고과와 수행 연구 과제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김 교수 등이 운영하는 학술단체 조직이 무심사 게재 특전, 학술대회 녹음 발표 등 여러 면에서 해적 학술단체의 특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원들이 몰리는 이유다.
이들 학술단체는 연구 결과를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게재하고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 특정 연구자들이 상대적으로 손쉽게 연구 실적을 쌓을 수 있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연구재단은 이 같은 돈벌이 행태를 단속할 권한은 없다고 말한다.
“저희 연구재단에서는 학회를 감사하거나 또는 주기적으로 어떤 활동을 감사하는 그런 기능은 없습니다. 다만 학술지 관련한 내용에 대해서는 저희가 점검을 할 뿐입니다. 저희의 점검을 받았다고 해서 학회의 신뢰성이 보장된다거나 저희가 학회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덕우 한국연구재단 학술기반진흥팀장
학계는 이 같은 ‘학문 장사'를 막기 위해서는 논문 수, 논문을 게재한 색인의 타이틀 등 양적 평가에만 치중하는 연구평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독버섯 같은 게 자라고 있는 건데, 그 독버섯만 없애려고 하거나 독을 가지고 있어서 나쁜 놈이라고 욕만 하거나 비난하거나 이럴 게 아니라. 그 독버섯을 형성시킨, 키운 그 저변을 들여다보는 게 국가가 할 일 아닌가라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저는 연구의 문제도 그와 비슷하다고 봐요. 전문가의 특징은 직업윤리에 충실 하는 것,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취재가 시작된 후 발 빠른 증거 인멸
김태훈 교수는 이 같은 학회 운영 행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뉴스타파의 취재가 시작되자 각종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김 교수는 취재진에게 주식회사인 “보안공학연구지원센터를 폐업하겠다.”고 말하고 바로 다음 날 비영리 학술단체라는 이미지로 거듭나려는 듯 ‘보안공학연구회’라는 이름의 페이지를 신설했다.
김 교수 측은 또 연회비 20만 원을 내는 SS등급으로 가입할 시 무심사 게재를 약속했던 융합학회 회원가입 안내 페이지도 바꿨다. SS등급(특급)에서 J등급까지 네 구간으로 돼 있던 회원 등급제를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단순화하고, 연회비도 최대 20만 원에서 6만 원으로 대폭 낮췄다.
심지어 아파이스 홈페이지는 아예 폐쇄됐다. 한국연구재단의 조사와 당국의 수사가 시급한 이유다.
출처: 뉴스타파 / 현직 교수, 페이퍼컴퍼니 끼고 ‘다단계 학회사업’ / 김지윤 기자 / 2018-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