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가 와셋과 오믹스 이외에도 유사한 가짜 국제학회가 있다는 제보를 토대로 별도의 ‘기업형 가짜 학회’ 네트워크를 추적한 결과, 인도의 특정 집단이 운영하는 엉터리 학회에 2014년부터 최근 4년간 1,300명이 넘는 국내 연구자가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연구비를 사용하거나, 연구실적으로 등록한 경우가 많아 정부의 추가 조사와 제재가 필요해 보인다.



인도의 가짜 학회들, 이름만 다르고 한 몸처럼 운영


뉴스타파 취재팀이 주목한 가짜 학술단체는 온라인 논문출판 사이트 ‘월드리서치라이브러리(WRL, World Research Library)’를 운영하고 있다. WRL은 대외적으로는 직접 학회를 운영하거나, 학술대회를 개최하지 않고 학술대회의 결과물인 발표논문집(프로시딩)만 출판한다.


취재팀은 WRL 웹사이트에 가짜학술대회 발표논문집을 출판하는 학회들을 거꾸로 추적해나갔다. IIER, ISERD, IASTEM, IRES, ResearchWorld, AcademicsWorld, ISER 등 공학 계열 국제학회들이 발표논문집을 내는데, 취재 결과 이 학회(이하 WRL 학회)들은 독립된 학술단체가 아니라 기업집단의 계열사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WRL 학회들의 등록 주소지와 웹사이트 도메인·IP주소, 운영자를 교차로 추적한 결과, 학술대회 홍보부터 개최, 발표논문 출판까지 하는 사업 구조가 확인됐다. WRL 학회들은 모두 인도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 지역의 한 건물 주소를 쓰는데 이곳을 주소지로 삼은 인도 학회만 최소 23곳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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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소에 등록된 또 다른 학술기관 ITResearch 가 WRL 네트워크 학회의 운영을 총괄하는 구조로 보인다. ITresearch는 가명(Domains meena, Prabin Mukherjee 등)을 돌려쓰면서 산하 주요 학회들의 웹사이트 도메인을 등록·소유하고 있다. 출판사 WRL의 도메인은 거꾸로 산하 학회인 IIER이 개설했다.


ITResearch는 산하 WRL 학회를 홍보하는 웹사이트도 최소 8곳 운영하고 있다. 모두 ConferenceAlert라는 같은 이름을 쓰면서 전 세계에서 열리는 WRL 학술대회 일정을 공지하고, 참가 등록 페이지로 유인하는 역할이다. 핵심 운영자 역시 겹친다. 취재팀이 포착한 Bijan Kumar Barik이라는 인물은 ITResearch와 WRL 학회 콘퍼런스의 상무이사이자 학회 ConferenceAlert의 관리자를 동시에 맡고 있다.


WRL 학회 집단은 가짜 학회의 운영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전 세계 관광도시 90여 곳에서 동시에 학술대회를 열고, 같은 장소에서만 10개 학회를 동시에 진행한다고 공지한다. 논문 저자가 미화 320달러(약 36만 원)만 등록비로 내면 실제 학술대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발표논문집과 증명서를 제공한다. 논문에 대한 동료 평가가 없으며, 이틀 일정으로 공지된 학술대회가 실제로는 반나절이면 끝난다.



WRL 가짜 학회, 서울·제주에서도 매달 개최


문제는 이런 엉터리 학술대회가 서울과 제주에서도 매달 열린다는 점이다. 뉴스타파 취재팀은 이달 서울과 제주도에서 열린다고 공지된 WRL 학술대회 현장을 직접 찾아갔다. 2018년 6월 18~19일 서울에서 열린다고 했던 AcademicsWorld 학술대회는 이틀 내내 열리지 않았다. 2018년 9월 19~20일 제주 ISER 학술대회는 19일 하루만 열렸다. 이날 발표논문집에는 9개 연구팀의 논문이 수록됐지만, 참가자는 두 명에 불과했다. 이틀 일정의 학술대회는 단 한 명의 발표만 진행되고 30분 만에 끝났다.


제주 학술대회를 진행한 인물은 놀랍게도 학회 소속이 아닌 대만 소재 대행사의 계약직원이었다. 이 직원은 신분을 밝힌 뉴스타파 취재팀에 WRL 학술대회의 이면을 경험한 대로 증언했다.


“학술대회를 해도 사람들 다수가 안 옵니다. 보통 교수들이나 학생들인데, 그들 다수가 돈만 내고 참가 증명서만 받으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나 봐요. 학술대회 등록하려면 돈을 많이 지불하잖아요. 그들에게는 참가 증명서, 그 종이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WRL 학술대회 개최 대행사 계약직원



뉴스타파, 발표 기록 전수 분석 “국내 연구자 1,348명 참가”


뉴스타파 취재 결과, 엉터리 WRL 학회에 한국인 학자들도 대거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뉴스타파 데이터팀은 2014년부터 최근 4년간 WRL이 출판한 학술대회 발표논문집(프로시딩)을 전수 분석했다. 그 결과, WRL 학술대회에 참가한 국내기관 연구자만 1,348명으로 집계됐다. 연인원(저자 등재 총건수)으로는 1,916명에 이른다. 2회 이상 엉터리 학술대회에 다녀온 국내 연구자들이 많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연구자별로는 금오공대 기계공학과 김경훈 교수가 논문 14건을 발표(참가 7회)해 투고한 논문 수로 1위에 올랐다. 김 교수는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문제가 된 학술대회에 참석하는 데 국가연구비를 일부 사용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김 교수는 현재 국가연구과제 2건을 맡아 연간 5천만 원가량의 연구비를 받고 있다.


김경훈 교수는 또 영어 논문 작성과 발표 연습 목적으로 참가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김 교수는 “영어 논문을 쓰는 연습, 준비 단계로 생각한다.”며 “학회의 질이 조금 떨어지는지는 몰라도 학생들이 그런 걸 해보면 또 좋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김 교수와 동료 교수들이 참가한 2016년 6월 필리핀, 지난해 2월 대만 학술대회 논문집에는 김 교수 일행의 논문만 수록돼 있다. 기록상으로 해당 학술대회에 영어로 교류를 할 해외 연구자들이 없었다는 뜻이다.


전남대 건축학과 한승훈 교수는 지난 2016년부터 올 6월까지 ISERD 등 WRL 학술대회에 8번 참가해 국내 연구자 중 가장 많았다. 전남대가 공개한 출장내역 자료에 따르면 한 교수는 WRL 엉터리 학회를 다녀올 때 최대 660만 원까지 국가연구비를 사용했다.


한승훈 교수는 뉴스타파 취재로 대표적인 가짜 학회 와셋(WASET)에 허위출장을 간 사실도 적발된 적이 있다. 전남대 출장내역을 보면 지난 4월 WRL 학술대회와 와셋 학술대회를 열흘 일정으로 동시에 다녀온 기록도 확인된다. 한 교수는 취재팀에 이메일을 보내 “출장은 규정과 계획에 따라 수행했다.”며 “준비하고 참여했던 곳이 가짜 학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국내 학자 상당수가 WRL 학술대회에 반복적으로 다녀오고, 국가연구비를 탕진했다. 그러고도 “규모는 작지만 정상적인 학술대회였고 토론도 활발했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취재팀이 제주에서 만난 해외 연구자들은 “엉터리”라고 불만을 터뜨리며 학술대회장을 떠났다.


“처음 이 학술대회에 올 때는 더 많은 지식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네요. 단 한 사람도 발표를 안 했어요. 심지어 주관학회가 참가를 허락한 사람들조차 오지 않았단 말이에요.”
-말레이시아 대학교수, 2018년 9월 19일 제주 ISER 학술대회


“무언가 새로운 걸 배웠으면 하는 기대를 했었죠. 그런데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파키스탄 출신 대학원생, 2018년 9월 19일 제주 ISER 학술대회



출처: 뉴스타파 / 와셋은 양반? 또 다른 가짜학회에 한국학자 수천 명 / 홍우람 기자 / 2018-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