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에게 여우가 길들여지듯 뇌도 환경에 길들여진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임’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히 구분되는 하나의 존재로서 각인된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길들임’과 비슷한 현상이 세포 수준에서도 일어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세포 수준에서 일어나는 ‘길들임’, 습관화와 장기 증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습관화와 민감화
‘길들임’이라는 것은 특정 대상을 인지하여 기억하고 그에 맞게 반응하는 일련의 과정이므로 일종의 학습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학습을 연구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복잡한 척추동물의 학습 대신에 비교적 단순한 신경계를 지닌 연체동물, ‘군소’를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군소의 흡입관이나 외막, 혹은 아가미를 건드리면 군소는 자극받은 부위를 격렬하게 움츠립니다. 달팽이의 더듬이나 몸을 건드리면 집 안으로 움츠러드는 것과 비슷한 반응이지요. 그런데 다른 자극들이 변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특정 자극이 반복적으로 제시될 경우, 해당 자극에 대한 반응이 감소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달팽이의 더듬이를 계속 건드리면 점차 움츠러드는 정도로 줄고,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시간도 줄어들지요. 이러한 현상을 ‘습관화(Habituation)’ 혹은 ‘둔감화’라고 부릅니다.
이름 때문에 조금 헷갈릴 수 있는데 이 현상은 일정한 자극에 익숙해져 그에 대한 반응이 줄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 사는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밤중에 들려오는 경적 소리에도 깨지 않고 꿀잠을 자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지요. 연구 결과, 습관화 현상이 발생한 이후에도 운동 뉴런을 자극하면 습관화 이전과 동일하게 반응이 일어나므로 이 현상은 운동 뉴런의 피로에 의한 것이 아니며 자극에 대한 감각 뉴런의 활성 정도 역시 습관화 이전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져 습관화는 감각 뉴런과 운동 뉴런 사이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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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된 현상으로는 ‘민감화(Sensitization)’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는 약한 자극에 대한 반응이 더 강한 자극에 노출된 결과로 증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군소를 단순히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자극하면 이어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움츠리는 반응을 보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현상이지요. 군소의 피부에 가해지는 강한 자극은 많은 감각뉴런의 시냅스 전 종말에 세로토닌을 분비하는 ‘촉진성 중간 뉴런’을 흥분시키고, 여기서 분비된 세로토닌은 시냅스 전 세포막에 있는 칼륨 이온 통로를 차단합니다. 그러면 칼륨이 세포 바깥으로 흘러 나가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활동전위가 일어난 뒤 재분극화하는 데 더 오래 걸리게 되고, 때문에 시냅스 전 뉴런이 신경전달물질을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분비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감각뉴런이 장기 민감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단백질을 합성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은 조건형성의 기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척추동물에서의 장기 증강과 장기 저하
이후, 척추동물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은 쥐의 해마에 있는 뉴런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어떤 가지돌기에 연결된 하나 이상의 축삭이 그 가지돌기에 빠르게 일련의 자극을 쏟아부으면, 그 시냅스들 중 일부는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주 동안 증강된 상태, 즉, 같은 유형의 새로운 입력에 대해 더 큰 반응을 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장기 증강(Long-term potentiation, LTP)이라고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변화로 장기 저하(Long-term depression, LTD)가 있는데요. 이것은 장기 증강에 대한 보상적인 과정으로 다른 시냅스가 활성화된 만큼 잘 사용하지 않는 시냅스가 약해져 균형을 맞추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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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에서의 장기 증강은 대부분 글루탐산 시냅스의 변화에 의존합니다. 글루탐산 시냅스가 갖고 있는 다양한 수용체 중에는 AMPA와 NMDA라는 두 유형의 글루탐산 수용체가 존재합니다. 이 둘은 모두 이온성 수용체로 자극을 받으면 이온이 시냅스 후 세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줍니다. 이때, AMPA 수용체는 나트륨 이온 통로를 여는 전형적인 이온성 수용체이지만 NMDA 수용체의 반응은 세포막의 분극화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세포막이 안정 전위일 때에는 NMDA 수용체의 이온 통로가 보통 마그네슘으로 막혀 있어 이온이 통과하지 못합니다.
마그네슘 이온은 세포 내부의 음전하에 끌어당겨져 이온 통로에 단단히 붙어있는데, 세포막이 탈분극화하여 마그네슘을 끌어당기는 음전하가 감소하면 마그네슘이 이온 통로에서 떨어져 나와 이온이 통로를 통과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시냅스 활동 신호가 한꺼번에 들어와 AMPA 수용체를 통해 나트륨 이온이 과하게 많이 유입되면 강한 탈분극화가 일어나는데, 그 결과 평상시에는 활동하지 않던 NMDA 수용체의 통로가 열려 나트륨뿐 아니라 칼슘 이온까지 유입됩니다. 이 칼슘은 CaMK Ⅱ라는 단백질을 활성화하고, 일련의 반응을 통해 CREB이라는 단백질이 방출되며, 이 단백질은 유전자 발현의 변화까지 일으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장기 기억이 형성되고 우리는 ‘길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장기 증강의 세 가지 특성 중에 특수성과 연합성이 있습니다.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진 여우는 ‘다른 모든 발소리가 구별되는 발소리를 알게 될’ 것이고 어린왕자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과 연합되는 ‘누렇게 익어가는 밀밭’을, 그리고 ‘밀밭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어린왕자가 지구에 와서 수많은 장미를 만났지만 고향별에 두고 온 장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듯 말입니다. 우리의 뇌가 특정한 대상을 구분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퍽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